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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이건희미술관’, 괜찮을까요?

한국 미술관 역사를 다시 쓸 기회, 서울 송현동 ‘이건희 기증관’의 명분·절차·지역·체계·역사를 둘러싼 5가지 질문
등록 2022-01-12 14:12 수정 2022-01-13 02:09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이건희 컬렉션 대표작 이중섭 화가의 <황소>. 한겨레 김혜윤 기자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이건희 컬렉션 대표작 이중섭 화가의 <황소>. 한겨레 김혜윤 기자

2만3283점. 2021년 4월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가족이 역사상 최대 규모의 소장품 기증을 했다. 여기엔 국가지정문화재 60점이 포함됐고, 소장품의 가치는 무려 2조~3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정선과 김홍도, 이중섭, 김환기의 작품, 외국 작가로 모네와 르누아르, 샤갈, 달리의 작품이 포함됐다.
정부도 흥분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별도 전시실이나 특별관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기증 석 달 만에 별도의 ‘이건희 기증관’을 건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전국 40개 도시에서 유치 신청이 쏟아졌다. 다시 넉 달 만에 문체부는 서울 종로구 송현동에 새 미술관을 짓겠다고 밝혔다. 기존 국립박물관이나 국립미술관과 별도의 조직을 꾸려 기증품을 소장·전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어마어마한 소장품이 기증됐고, 그것은 한국의 미술관, 박물관의 역사를 다시 쓸 만큼 좋은 기회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건희 컬렉션’을 그 가치에 부합할 만큼 잘 활용하고 있는가? 이건희 컬렉션을 통해 우리의 문화·예술 정책을 발전시키고 있는가? 이건희 기증관이 한국 사회에 던진 질문을 생각해봤다. _편집자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문화재·미술품 등 기증품을 바탕으로 만들겠다는 ‘(가칭) 이건희 기증관’을 두고 정부와 시민단체 간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기증자의 취지를 존중해, 2027년까지 서울 종로구 송현동에, 이번 기증품만으로 이뤄진, 독립된 체제의 융복합 미술관을 짓겠다고 2021년 11월 밝혔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2021년 12월22일 기자회견을 열어 반대하고 나섰다. 기증자 이름을 딴 국립미술관은 유례가 없고, 절차가 졸속이며, 서울 중심적이고, 기존 미술관·박물관 체제를 무너뜨리며, 송현동의 역사적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비판이었다. 5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정부의 ‘(가칭) 이건희 기증관’ 추진 계획과 시민단체의 비판 의견을 살펴봤다.

1. ‘국립이건희미술관’ 타당한가?

정부는 이 미술관의 이름을 ‘(가칭) 이건희 기증관’으로 하고, 이 회장의 기증품만으로 이뤄진 독립된 미술관을 2027년까지 짓겠다고 밝혔다. 이건희 회장 가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2만1693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1488점 등 2만3181점이 대상이다. 이 미술관은 현재 소유주인 한진그룹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매각을 추진 중인 송현동 터 3만7141㎡ 가운데 9787㎡(26.4%)를 사용해 연면적 3만㎡ 규모로 지어진다.

문제는 이 미술관의 가칭이 ‘이건희 기증관’이라는 점이다. 나중에 지어질 정식 명칭에도 ‘이건희’란 이름이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도 2021년 4월 이건희 회장 가족이 소장품을 기증한 직후 “별도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는 2021년 7월 “명칭은 향후 많은 의견을 수렴해 더욱 확장성을 가진 이름으로 교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미술관의 성격이 ‘국립이건희미술관’이 되리라는 점엔 변함이 없다. 박명순 문체부 지역문화정책국장은 “명칭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이건희 기증관’이란 성격은 유지된다. ‘이건희 컬렉션’이란 특별한 자산을 브랜드로 만드는 미술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은 기증자 이름을 딴 대규모 국립 문화시설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열 미술사가는 “국립미술관에 개인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중대한 문제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과거 이건희 개인의 문제도 있었고, 기증 당시엔 아들 이재용씨가 수감된 상황이었다. 이렇게 기증 취지가 의심스러운데, 이를 정부가 나서서 기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안창모 경기대 교수(건축학)도 “2000년 삼성이 송현동 땅을 사들여 미술관을 지으려다가 실패했다. 삼성 돈으로 짓는 것도 아니고 정부가 수천억원 예산을 투입해 ‘삼성미술관’을 지어주는 것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2021년 7월7일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기증품과 관련해 답변하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2021년 7월7일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기증품과 관련해 답변하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2. 졸속 절차로 추진할 일인가?

정부는 하룻밤 만에 발굴을 마친 1971년 백제 무령왕릉 발굴 때처럼 절차를 무시하고 성급하게 이건희 기증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문체부는 2021년 4월 기증받은 뒤, 6월에 문체부 장관이 일방적으로 교수 등 7명으로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활용위)를 구성했다. 활용위는 7월 이건희 기증관을 별도로 짓기로 했고, 그 후보지를 서울 송현동과 용산으로 발표했다. 11월엔 최종 후보지를 송현동으로 결정하고 예비타당성조사에 들어갔다. 2022년 하반기엔 설계 공모를 하고, 2023년 공사에 착수해 2027년 완공할 예정이다. 숨가쁜 일정이다.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공론화 과정을 건너뛰었다고 비판했다. 박선영 문화연대 활동가는 “이건희 기증관은 기존 미술관·박물관과의 관계, 기증품의 조사·연구, 지역 간 균형발전, 새 미술관의 위치와 내용 등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껏 공청회나 토론회, 지역 의견 수렴 등 공론화 과정이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도 “기증품에 대한 충분한 조사나 검증 없이 기증관부터 짓겠다고 발표했다. 대표성이 없는 활용위가 밀실에서 중요한 문제를 멋대로 결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박명순 문체부 국장은 “전국에서 유치 의견이 뜨거워서 공론화가 어려웠다. 또 국립 문화시설을 지을 때마다 공론화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활용위를 통해 의견을 수렴해왔고, 앞으로도 필요하면 더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말했다.

3. 모든 국립미술관은 서울로?

전국 40여 개 도시에서 ‘이건희 기증관’ 유치를 신청했다. 이건희 회장의 출생지이자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삼성상회를 시작한 대구에선 경북도청 터와 미술관 건축비 250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부산은 북항과 해운대구 청사를, 인천은 뮤지엄파크를, 대전은 충남도청 건물을 터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세종시는 균형발전을 내세웠다. 중소도시들도 무수한 유치 제안을 했다. 그러나 2021년 11월 문체부는 이 모든 제안을 물리치고 서울 송현동에 짓겠다고 발표했다.

박선영 문화연대 활동가는 “다른 부문도 지방과 수도권 간 불균형이 심하지만 문화정책에선 더욱 그랬다. 모처럼 지방정부들이 국립미술관을 강하게 요구했는데 중앙정부가 완전히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김사열 국가균형발전위원장도 “지방 도시들이 이건희 기증관 유치를 엄청나게 희망했는데 또다시 서울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 하나하나가 수도권 집중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명순 문체부 국장은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방에 13개 국립박물관이 있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청주 외엔 지방에 분관이 없다. 지방에도 국립미술관이 있으면 좋겠지만 재정이 많이 부족하다. 인력과 소장품이 제한됐고, 지방의 여건도 좋지 않다. 기존 시립·도립 미술관을 지원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의 주요 전시를 전국에 순회 전시하겠다”고 말했다.

2021년 12월22일 박선영 문화연대 활동가가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건희 기증관’ 건립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문화연대 제공

2021년 12월22일 박선영 문화연대 활동가가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건희 기증관’ 건립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문화연대 제공

4.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위에 ‘이건희 기증관’?

2021년 7월 문체부는 “기증품 2만3천여 점을 통합적으로 소장·관리하면서 분야와 시대를 넘나드는 연구·전시를 위해 ‘별도의 기증관’이 필요하다. 기증품 활용 효과를 높이기 위해 새로 건립되는 기증관과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의 유기적 협력 체제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이건희 기증관을 새로 만들고 인력과 조직도 기존의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과 별도로 꾸리겠다는 뜻이다.

이런 문체부의 발표는 사실상 기존의 국립 박물관·미술관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조선시대까지의 역사 유물과 미술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미술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전시해왔기 때문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은 13개 지방 국립박물관을 소속기관으로 두고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은 4개 관을 보유하고 있다. 이건희 기증관은 이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시대부터 현대, 역사 유물에서 도자기, 서적, 가구, 회화에 이르는 2만3천여 점의 소장품을 한 미술관에 모아두는 게 합리적인지 의문이 제기된다.

박소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미술관·박물관학)는 “기증품이 미술사적 맥락에서 자기 자리를 찾게 하는 것이 기증품에 대한 예의다. 독립된 기증관은 미술사적 맥락을 보여주기 어렵고, 이건희 기증품을 고립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최열 미술사가도 “기증자가 별도의 기증관을 지어달라고 한 것이 아니다. 기증자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지방 미술관에 나눠 기증했으면 그에 따라 관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활용위의 정연심 위원(홍익대 예술학과 교수)은 “과거엔 미술관이 시대나 사조별로 나뉘어 세워졌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처럼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미술관도 나온다. 전문화도 필요하지만 통합해서 보여주는 미술관도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5. 하필이면 송현동에?

송현동에 대규모 미술관을 짓는 것은 이 땅의 역사와 녹지의 가치를 무시한 결정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송현동은 조선 초기부터 경복궁을 감싸는 솔숲이 조성됐던 곳이다. 풍수상, 보안상 경복궁을 보호하려는 뜻으로 집을 짓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힘이 절정에 이른 조선 후기에 청송 심씨, 장동 김씨, 해평 윤씨 등 이른바 경화세족(서울의 권력 가문)들이 잇따라 차지해 거대한 저택을 지었다.

일제 때는 일제의 식산은행이 이 땅을 사들여 사택을 지었으며, 해방 뒤엔 미국 정부가 매입해 50년 이상 미국대사관 직원의 숙소로 사용했다. 2000년 이후 삼성이 미술관을, 대한항공이 호텔을 지으려다 실패했다. 2010년대 들어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이 공원 조성을 요구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이건희 기증관 터로 변경됐다.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20세기 송현동의 역사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치욕의 역사다. 비워두고 숲으로 조성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두규 우석대 교수(교양학부)도 “과거 송현동은 풍수적으로 경복궁의 기운을 보호하는 자리에 있었다. 서울의 미래를 생각해 신중하게 쓰임새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언 서울환경연합 생태도시팀장은 “고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에 생태공원으로 용도를 확정했던 곳이다. 서울 도심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은 평지의 녹지다. 도심에도 교통 약자를 위한 녹지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정연심 활용위원은 “송현동에 미술관을 지어도 70% 정도의 터는 그대로 남는다. 설계 과정에서 주변 환경이나 녹지와 잘 어울리게 미술관을 짓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이건희 컬렉션

기증된 ‘이건희 소장품’(컬렉션)은 모두 2만3283점으로 한국 역사상 최대 기증 규모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2만1693점은 1946년 개관 이후 기증된 전체 5만여 점의 43%에 이른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1488점도 1969년 개관 이후 기증된 작품(5400여 점)의 27%다. 이 밖에 광주시립미술관(30점), 전남도립미술관(21점), 대구미술관(21점),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18점), 제주 이중섭미술관(12점) 등 102점을 지방 미술관에 따로 기증했다. 기증품의 가치는 2조~3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최고의 전통 회화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를 비롯해 고려시대 작품으로 유일한 <고려천수관음보살도>(보물), 김홍도의 마지막 그림인 <추성부도>(보물) 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소장품에는 국보 14건, 보물 46건 등 국가지정문화재 60점이 포함됐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작품에는 이중섭의 <황소>, 김환기의 <절구질하는 여인> 등 한국 유명 작가의 미술품 460여 점과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피에르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 등 외국 유명 작가의 작품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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