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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퀴어

등록 2021-11-23 16:23 수정 2021-11-24 02:10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2010년 9월29일 한 종합일간지 하단에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라는 광고가 실렸다. 당시 SBS에서 방영되던 김수현 작가의 따뜻한 가족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 게이 커플이 등장하자, ‘참교육 어머니 전국모임’과 ‘바른 성문화를 위한 전국연합’이라는 단체에서 “국가와 자녀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떨쳐 일어난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섭(송창의)과 경수(이상우)가 가족의 인정 속에 사랑을 다짐하며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11년 사이 한국 대중매체의 변화

뉘 집 아들이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가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올해는 여러 집 딸과 아들이 퀴어가 됐을지도 모른다. 상반기 히트작 tvN <마인>의 정서현(김서형)은 허울뿐이어도 명색이 남편인 한진호(박혁권)에게 자신이 여성을 사랑하는 성소수자임을 명확히 밝혔다. 자신의 정체성을 누구에게도 사과할 이유는 없지만 속인 것만은 미안하다는 정서현의 태도도, 경영능력과 성정체성은 상관없다며 그를 받아들이고 지지하는 한진호의 반응도 마치 ‘커밍아웃 교육 자료’처럼 합리적 상호존중을 토대로 그려졌다. JTBC <알고 있지만,>에서는 친구 사이였던 윤솔(이호정)과 서지완(윤서아)이 연인으로 발전했고, tvN <더 로드: 1의 비극>의 차서영(김혜은)은 오로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권여진(백지원)과 외도를 저질렀다.

JTBC <구경이>에는 한국 드라마에서 드물게 ‘사연 없는’ 퀴어 캐릭터가 등장한다. 서사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적 지향이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갈등 요소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경이(이영애)의 게임 동료 나도현(강다현)은 성별과 정체성이 모호하게 연출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이 어린 도박중독자가 어떻게 자살 충동을 벗어나 계속 살아가느냐다. 연쇄살인범 송이경(김혜준)의 조력자 건욱(이홍내)이 직장 동료 대호(박강섭)와 자연스레 연인이 되는 과정에도 정체성에 대한 고뇌나 사회의 편견 등은 굳이 나오지 않는다. 그가 꿈꾸는 행복이 흔들리는 건 게이라서가 아니라, 범죄를 그만둘 수 없는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인생은 아름다워> 이후 11년, 한국 대중매체의 퀴어 재현은 꾸준히 늘어나 다양하게 발전하는 중이다. 유튜브를 비롯한 개인방송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사랑받는 퀴어 당사자도 적지 않다. 특정 드라마나 방송사를 탓하며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려던 혐오 세력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어떤 정치는 혐오의 편이다. 2021년 11월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 국민동의청원 심사기한을 하루 앞두고 이 청원의 심사기한을 21대 국회 마지막 날인 2024년 5월29일까지로 연장했다.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평등과 안정이 누군가에겐 또다시 유예된 것이다.

최소한의 평등과 안정은 다시 유예되고

다시 드라마 얘기로 돌아와보자. 최근 방영된 티빙 오리지널 <술꾼도시여자들>에서 담임교사 강지구(정은지)를 좋아하는 고등학생 박세진(한지효)은 가족과 또래 집단의 동성애 혐오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만약 차별금지법이 존재하는 세계라면 세진의 삶은 다르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 세계에서 평범한 퀴어 가족, 친구,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최지은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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