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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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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인·전문자 아니라 ‘전문가’인 이유

‘인성 담론’ 만발하지만 도덕적이지 않은 한국 사회, 직업윤리는 ‘사회’를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
등록 2021-11-10 06:41 수정 2021-11-10 23:04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를 지탱하는 윤리로 직업윤리에 주목했다. 위키백과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를 지탱하는 윤리로 직업윤리에 주목했다. 위키백과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이번 대선을 좌우하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가 ‘인성’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가 멀다고 각 후보자의 인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일례로 로봇 전시회에서 이재명 후보가 로봇을 넘어뜨린 일도 인성 문제로 이슈화된다. 정치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안을 다루는 방식도 그 후보자의 인성을 문제 삼는 일이 많다. 언제부터 한국 사회가 이렇게 개인의 도덕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나 싶을 정도다.

‘도덕적 진공상태’의 인성 담론

그런데 눈을 돌려보면 정치인뿐만 아니다. 연일 연예인의 사생활을 폭로하면서 등장하는 단어가 인성이다. 친구를 대하는 인성, 연인을 대하는 인성, 반려동물을 대하는 인성 등등. 범죄에 해당하는 일도 인성 문제로 다루고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것도 인성 문제로 이야기한다. 도덕군자가 아니면 연예인도 되지 못할 것 같다.

이렇게 들끓는 인성 담론을 보면서 누구도 한국 사회가 도덕적인 사회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덕’을 가장 중요한 사회의 가치이고 통치 이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 한국 사회는 덕은 고사하고 감정까지 아무렇게나 막 터뜨리고 다른 사람을 막 대해도 되는 것처럼 황당한 사건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다. 가히 ‘도덕적 진공상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 진공상태를 인성이라 불리는 개인의 도덕을 개탄하며 시민들의 도덕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요구한다고 해결될까? 전혀 아니다. 오히려 도덕적 진공상태는 인성이나 시민의 도덕에 문제가 생겨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빈번한 교류가 일어나는 중간 단계에서 매개되는 윤리가 부재하고 그 윤리를 규율할 집단이 무능하거나 타락해서 발생할 확률이 높다. 일례로 음식점 주인이 수기로 작성한 고객의 전화번호로 “사귀자”고 문자를 보낸다. 이런 짓을 하면 자기 직업을 욕보인다는 의식이 작동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직업윤리에 대한 의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국민의힘 원희룡 대선 예비후보의 배우자인 강윤형 정신과 전문의가 유튜브에 출연해 이재명 후보를 ‘소시오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일종)라고 비판했다. 어떤 이는 선거가 격화되면 후보와 후보자 주변 사람들에 의해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회’를 걱정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사회의 근간이자 가장 중요한 토대가 바로 ‘직업윤리’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전문의인 강윤형씨는 공개적으로 대선 후보에 대해 병증을 운운했다. 유튜브 채널 <매일신문> 갈무리

정신과 전문의인 강윤형씨는 공개적으로 대선 후보에 대해 병증을 운운했다. 유튜브 채널 <매일신문> 갈무리

시민적 요구와 전문가적 진단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사회를 지탱하는 윤리로 주목한 것이 직업윤리다. 인성이 아니다. 그는 유럽이 근대 자본주의 이후 경험할 위기를 경제활동의 비도덕적 성격에서 찾았으며, 이를 통제하지 못하면 공적 위험이 초래되므로 개인과 국가 사이에서 ‘의무감을 상기시키는 어떤 집단’이 있어야 한다고 봤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수단이 ‘직업집단’이며, 이 직업집단이 개인과 국가를 연결하는 고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직업집단은 직업윤리에 의해 유지된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대해 강윤형씨의 직업윤리 위반을 비판했다. 정신과 전문의가 자신이 직접 진료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공개적으로 정신과 질병을 거론하는 일 자체가 직업윤리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미 과거에 한 정신과 전문의가 방송에서 한 연예인에 대해 진료하지 않고서도 진단명을 단언했다가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제명당한 사례가 있기에 더욱 이 주장에 힘이 실렸다.

원희룡 후보는 이에 대해 대통령의 건강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지만, 직업윤리 차원에서 보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고 해야 한다. 대통령의 건강은 공적 주제이다. 누구나 의심 가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진단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민적’ 요구이지 결코 전문가적 ‘진단’이 되면 안 된다. 그가 아무리 한 ‘시민’으로서 말했다고 해도 그 분야의 전문가인 한 그것은 정치적 ‘의견’이 아니라 ‘진단’이기 때문이다.

정치 영역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전문가가 개입할 때는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 물론 ‘정책’ 영역이라면 다르다. 그는 그 정책에 대해 자신의 소신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시민으로서 전문가가 정치를 통해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정신과 전문의는 현재 한국의 시설 수용을 통한 정신질환 환자를 치료하는 방식에 대한 정책을 어떤 후보가 낸다면 그에 대해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것이 지지이든 반대이든 말이다. 그런 논쟁은 사회가 어떻게 돼야 하는지에 기여하는 훌륭한 발언이 될 수 있다.

전문집단 속에서 규칙 개정 위해 싸워야

이 경우에도 전문가는 자신이 속한 전문집단의 합의된 ‘공통’이 있다면 거기에 근거해 소신을 이야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정신과 전문의라면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달리 이미 정신의학에서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훈련받았고 그것이 자신이 속한 전문집단의 합의된 ‘공통’ 내용임을 안다. 그렇다면 그 집단에 소속된 전문가는 자기 권위의 기반이 되는 ‘공통’을 보호하고 준수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전문가로서 직업인의 ‘직업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공정’을 기하기 위해 말한다면 최근 공개적으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를 지지한다는 논란에 휩싸인 방송인 김어준씨의 경우도 있다. 미국과 다르게 한국은 언론사와 언론인이 공개적으로 선거에서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방송의 공정성을 해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런다고 방송과 언론이 공정을 지키는 게 아니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더 ‘교묘한’ 방식으로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위한 방송을 하고 기사를 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언론의 ‘언어’를 좀더 정직하게 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 전문집단 안에서 규칙을 개정하기 위해 싸우거나 이것을 강제하는 국가의 규제에 맞서야 한다. 그 활동을 하는 동안은 집단 내에 있는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그 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혹은 대놓고 위반하며 싸우며 그 규칙의 정당성을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교묘’하게 행동한다면 단기적으로는 자기 정파의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집단의 자율성에 훼손을 가하게 된다. 그것은 국가가 개입해 사회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무엇보다 국가의 개입이 정당화되는 것, 이 상황이 사회라는 관점에서 보면 매우 위험하다. 직업윤리가 개인의 도덕적 결백 문제가 아니라 ‘사회’를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인 이유다.

전문가 윤리를 법으로 규율할 때

그래서 전문가는 의미심장하게도 전문‘인’이나 전문‘자’가 아니라 전문‘가’라고 불린다. 그가 그냥 전문지식을 가진 한 명의 개인이 아니라 ‘가’라고 불리는 집단에 소속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속한 ‘가’의 ‘안’에서 자신의 견해를 말하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근거를 모으고 논리를 주장하는 등 이견을 가진 존재로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으며 그것은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그가 합의된 ‘공통’의 바깥에서 ‘공통’을 무너뜨리는 발언을 제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전문집단 권위의 근간을 무너뜨린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근대사회의 직업집단은 고도의 자율성에 기반을 두고 조직되고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업집단별로 획일화되고 통일된 규율이나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률가가 지켜야 하는 직업윤리와 의료인이 지켜야 하는 직업윤리는 같지 않다. 고도로 분화된 각각의 전문 영역은 각자의 가치와 그에 따른 문법이 있다. 전문가 집단에 자율성이 생명인 이유는 바로 각 영역의 문법이 다르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문집단의 직업윤리를 나라의 법으로 규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례로 수술실에서 의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리수술 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설치해 통제하는 건 ‘원리상’으로 근대사회의 원칙을 훼손하는 일이다. 이런 직업윤리 위반에 대해서는 국가의 법으로 통제하기보다 의사협회가 더 가혹하게 징계해 규율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맞다. 당장의 범죄행위는 막을지 몰라도 자율성이 훼손되면 집단의 권위와 자정 역량은 더 떨어지며 장기적으로는 사회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직업집단이 권위를 가지고 직업윤리를 “구체적인 것에 더 가깝게, 사실과 더 가깝게, 그리고 오늘날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넓은 범위”로 확립한다면 시민들은 대부분 직업윤리에 무관심해진다. 시민 대중은 직업윤리를 어기는 행위에 대해 ‘직업적 테두리’에서의 문제라 생각하고 그 ‘엄격한 테두리 바깥’에서는 ‘다소 모호한 비난’을 하며 공론은 ‘관대’하게 봐주게 된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뭐 저런 걸 가지고 저 정도까지 징계를”이란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윤리 담론은 완전히 거꾸로라는 점에서 참담한 수준이다. 권위를 가져야 할 집단의 응집력이 형편없고 무능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직업집단 사이 서로의 윤리에 대해서도 불신이 높다. 전문가로서 각각의 직업집단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자율성에 국가가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지만, 시민으로서 다른 직업집단에 대해서는 공적 개입을 강하게 요청한다. 자기 집단의 자정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자율성이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목청 높이지만 다른 집단의 자정능력에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전문집단이 내부 윤리에 대해 무력하거나 외면하고 심지어 위반자를 감싼다고 여긴다.

권위를 가져야 할 집단에 대한 불신

그 결과 한국 사회는 ‘도덕적 진공상태’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 진공의 실체는 개인의 인성도 시민의 도덕도 아니라, 바로 ‘직업윤리’의 진공이다. 이 진공상태는 개인과 국가를 매개하는 이 중간 집단, 가장 결정적인 중간 집단의 윤리가 무너질수록 시민들은 더욱더 개인과 시민의 도덕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며 타인의 인격을 난도질해 물어뜯는 끔찍한 ‘디지털 카니발리즘’에 빠져들 것이다.

혹시라도 이번 대선이 도덕적으로 파산 상태에 가까운 한국 사회에 ‘희망’이란 걸 가져오려면 모든 것을 ‘정치 문제’라고 앙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간 집단에 더 많은 자율성과 더 강한 윤리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사회’를 구축하려는, 사회를 ‘통해’ 통치하려는 이 ‘지도력’이 너무나 간절하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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