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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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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비장애인이 장애인이 되는 것

장애인은 언젠가 나도 겪을 일을 먼저 겪을 뿐인 이웃,
너도나도 대기표를 받고 기다리는 중
등록 2021-04-25 13:50 수정 2021-04-30 02:02
동환이가 아빠의 이야기에 웃고 있다. 지하철에서도 동환이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늘고 있다. 사람들은 분명 변하고 있다.

동환이가 아빠의 이야기에 웃고 있다. 지하철에서도 동환이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늘고 있다. 사람들은 분명 변하고 있다.

오랜만에 친정에 갔더니 엄마가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하며 신음한다. 어깨뼈 문제가 생겨 팔을 들 수 없다고 한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손주 다섯 명을 번갈아 가며 돌보느라 어깨를 무리하게 사용한 탓이다. 미안한 마음에 눈만 껌벅이는데 엄마가 조용히 말한다.

“이렇게…, 이렇게 팔을 전혀 들 수 없거든. 팔을 못 쓰니 알겠더라. 장애가 별거 아니더라. 나도 장애인이더라.”

“장애 별거 아니더라 나도 장애인이더라”

이 말 안에 ‘장애’에 대한 많은 것이 함축적으로 담겼다. 하나씩 풀어가보자. 장애가 무엇인지, 장애인이 누구인지.

장애이해(공감) 교육 현장에서 “우리는 모두 예비 장애인”이라는 말이 나오면 사람들은 질색한다. “지금 협박하는 것이냐”며 발끈하기도 한다. 장애 당사자도 이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사람을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눈다는 생각에서다. 분명 그 지점에서의 우려를 충분히 품고 있음에도 “우리는 모두 예비 장애인”이라는 말은 선명한 진실이다. 사고는 예방할 수 있어도 노화마저 피할 순 없다.

마흔 살을 갓 넘긴 어느 날, 아이들 손톱을 정리하다 남편에게 거실 불 좀 켜달라고 했다. 이미 켜져 있다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눈앞이 침침하고 답답한 느낌. 말로만 듣던 노화의 시작이었다. 요즘 나는 무릎 관절이 삐걱거려 달리기를 못하고 손목이 아파 무거운 가죽가방을 못 들고 다닌다. 언젠가는 혀의 감각도 둔해져 음식이 짜게 될 테고, 귀가 잘 안 들려 텔레비전 소리도 커질 것이다. 내부 장기도 하나씩 고장 날 테니 그때마다 잘 고쳐 써가며 ‘유병장수’ 시대를 살아야 한다.

장애의 사전적 의미는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못해 결함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사전적 정의만 따라도 노인이 된다는 건 곧 장애가 있는 상태로 들어선다는 걸 뜻한다. 꼭 복지카드를 발급받아야만 장애인이 아니다. 신체 기관이 제 기능을 못하는 ‘어떤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장애인인 셈이다. 장애인의 범위는 이렇게 넓어져야 한다. 그래야 저마다의 상황에 맞는 사회복지 혜택을 고루 받을 수 있다.

4월19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0년도 등록장애인 현황’을 봐도 장애인구 가운데 노년층 비율이 급격히 늘었다. 65살 이상 노년층 장애인이 49.9%로 이미 등록장애인의 절반이 고령층이다. 여러 이유로 장애 등록을 하지 않은 이들까지 고려하면 장애가 있는 ‘어떤 상태’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노년층 비율은 대폭 늘어날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가 비장애인에서 장애인으로 되어가는 과정이라면 그때의 장애는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지금 내 옆을 지나가는 장애인은 언젠가 나도 겪을 일을 먼저 겪을 뿐인 이웃이 된다. 사람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장애와 비장애는 어떤 과정에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된다.

장애인 예산, 미래의 나를 위한 보험

발달장애인 아들처럼 선천적 장애를 타고난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록 내 자식은 비장애인이었지만 손주나 조카, 친구네 가족이나 이웃에선 자폐성 장애인이 태어날지도 모른다. 우리 엄마도 본인이 발달장애인의 할머니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애는 내 삶과 긴밀히 연결됐다. 이 선명한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장애인은 그들만의 리그에 속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너도나도 대기표를 받고 기다리는 중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 마을에 특수학교가 들어서도 반대하지 않으며 장애인 지원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사회복지 예산을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줄이려 꼼수를 쓰지 않는다. 부모가 치매에 걸려도 안심할 수 있고 가족 구성원 중 일부가 장애인이 되더라도 나머지 가족의 일상이 파괴되지 않는다. 소수자를 위한 예산이 아니라 미래의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보험, 사회안전망 차원에서 사회복지에 접근하면 이렇게 많은 것이 바뀌게 된다.

“장애가 별거(특별한 것) 아니더라. 나도 장애인이더라”라는 엄마의 말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어, 그렇다니깐. 엄마, 장애가 그런 거예요.” 아픈 엄마 앞에서 반가움에 목소리가 커진 이유다.

최근 비장애 형제자매로 특수교사의 길을 걷는 누군가를 만났다. 또래인 우리는 부모 입장에서, 형제자매 입장에서 장애인 가족 구성원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절하죠, 이 삶”이라는 그의 말에 우리는 한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 장애가 처절하다는 게 아니다. 개인의 장애는 그냥 장애일 뿐인데 그로 인해 당사자와 가족의 삶에 장애물이 생기고, 힘겹게 그 장애물을 치우며 조금씩 나아가는 현실이, 때론 한숨 나고 때론 슬프기도 한 사회의 장애 인식과 복지체계를 온몸으로 맞닥뜨리며 조금의 변화라도 일구기 위해 낑낑대며 사는 삶이 처절하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사람들은 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잘 살아보려 애써봐요, 우리.” 분명 조금씩이지만 사회는 변하고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더니 아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몇 달 전과 확연히 달라 솔직히 놀랐다. 제자리에서 통통 뛰기도 하고 발도 까딱거리고 알아듣지 못할 외계어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는 아들은 변한 게 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변했다.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이 앞다퉈 아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더니 옆자리 할머니는 아들에게 “응, 재밌어?”라며 말을 걸고 손을 꼭 잡아줬다. 아들의 행동을 곁눈으로 흘끔거리거나 거리를 두고 멀찍이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몇 달 새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변화의 희망에 기대어 또 하루를 살아본다. 장애와 비장애가 ‘어떤 상태’에 있을 뿐인 미래를 꿈꿔본다.

글·사진 류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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