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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덕에 조금씩 ‘민주주의자’로

사이드 바이 사이드, 페이스 투 페이스… 함께 산 지 9년 된 고양이가 가르쳐준 것들
등록 2021-04-17 15:13 수정 2021-04-23 02:17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는 ‘함께’. 인간 세상의 ‘함께’는 타자성을 경멸하지만 고양이와의 ‘함께’는 타자를 나란히 대면한다. 한겨레 박미향 기자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는 ‘함께’. 인간 세상의 ‘함께’는 타자성을 경멸하지만 고양이와의 ‘함께’는 타자를 나란히 대면한다. 한겨레 박미향 기자

나는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이 친구와 함께 산 지 햇수로 9년째다. 처음 데리고 왔을 때는 1살로 추정되는 ‘청소년’ 고양이였지만 지금은 뱃살이 같이 처지면서 서서히 동년배가 됐다가 이제 이 친구가 나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고양이 나이 10살이면 인간 나이로 50대 중반으로 여긴다고 하니 말이다.

동물과 함께하는 삶은 나에겐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도시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숱하게 많은 동물을 키웠다. 개는 물론이고 닭, 토끼를 키웠다. 심지어 ‘매’도 키웠다. 다쳐서 땅에 떨어진 매를 동네분이 주워왔는데 내가 치료해주고 1년간 키웠다. 하루에 개구리 수십 마리를 먹어치우는 먹성이라, 학교에 갔다오면 매의 먹이인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는 게 내 일이었다. 당연히 나는 공부를 안 하게 됐고 이에 화난 어머니가 동네분을 시켜서 매를 산으로 날려보냈다. (사실 난 울고불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매가 언젠가 날아갈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모범 같은 고양이

반려동물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선뜻 키우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이런 시골에서의 기억 때문이었다. 동물은 자연 속에 있을 때, 그리고 자기 무리와 어울려 있을 때 그것이 그 동물의 ‘삶’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내가 잘해줘도 그 동물이 잘 사는 것인지 회의적이었다. 개는 동네를 뛰어다니며 다른 개와 함께 놀아야 하고, 닭은 닭장 밖에서 구구거리며 마당을 돌아다녀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반려동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친구들과 함께 했지만 키우는 것은 꺼렸다. 게다가 고양이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어릴 때 본 영화에서 고양이가 복수하는 내용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고양이를 ‘요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울의 공동주택에서 개와 함께 살 자신은 도저히 없었다. 이웃 눈치도 보이고, 무엇보다 산책 등 반려견이 나에게 정서와 활동을 의존하는 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이 친구를 만났다. 서울 바깥의 도시에서 전 ‘주인’이 더 이상 같이 살지 못하게 되었다고 ‘무료’로 내놓았다. 무엇보다 전 ‘주인’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혼자 사는데 자기가 일한다고 너무 오래 집을 비우고 돌아오면 지쳐서 잠자기 바빠, 그것이 고양이에게 미안했다고 한다. 진짜 사정이야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에 이끌려 바로 연락하고 그 도시에 사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고양이를 데리고 왔다.

이름은 전 ‘주인’이 지은 대로 불렀다. 고양이는 새로운 집에,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고 경계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이른바 ‘개냥이’처럼 나한테 달라붙지도 않았다. 좀더 살갑게 굴지 않는 게 섭섭했지만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고양이는 딱 2m 거리를 유지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정말 사회적 거리 두기의 모범이라 할 만했다. 이런 점도 마음에 들었다. 같이 잘 지내보자고 혼잣말했다.

말이 쉬워 잘 지내는 거지, 잘 지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동물보다 더 어려운 것이 사람이고 사람보다 더 어려운 것이 국가다. 국제단체에서 일할 때 유엔 인권이사회에 가면 가장 뜨거운 주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서 비롯되는 인권침해였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한편이 되고 나머지 국가들이 주로 이들을 맹공했고, 유럽은 늘 주춤주춤하는 태도를 보였다. 당시 이 주제로 격론이 벌어지면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나란히/함께’(side by side)였다. 평화공존안 자체가 이 말에 근거를 뒀다.

당시 나는 이 말이 분쟁을 해결하고 평화를 달성하는 데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이스라엘이 원하는 건 팔레스타인이 없는 자기들의 땅이었고, 팔레스타인이 원하는 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거기 어디에도 나란히/함께는 없었고 그 말은 존재할 수 없어 보였다. 특히 영토가 대부분 민족을 기준으로 분할되고 주도권이 행사되는 근대 정치체제의 특성을 볼 때 '나란히'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2021년 4·7 재보궐선거. 주인이라 선언하지 않고 모두가 손님인 민주주의를 고양이를 기르면서 알게 됐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2021년 4·7 재보궐선거. 주인이라 선언하지 않고 모두가 손님인 민주주의를 고양이를 기르면서 알게 됐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서로서로 사이에 끼여서 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말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한국말로 하면 ‘나란히’지만 그 어감은 적어도 나에겐 서로서로 사이에 끼여서 사는 것이라는 인상을 줬다. 즉, 나도 중심(centre)이 아니라 옆(side)이며 너도 중심이 아니라 옆이고 그렇게 서로 중심 없이 옆에 서로 끼여 공존하는 이미지가 이 말이 주는 어감이었다. 사전적 의미인 ‘함께’는 느껴지지 않아 더 좋았다. ‘함께’가 의식적으로 무엇인가를 같이 해야 한다는 뜻을 가졌다면, ‘나란히’는 어떻게 살다보니 내가 사는 곳에 네가 있고 네가 사는 곳에 내가 있다는 인상을 줬다.

그래서 고양이가 내 집에 온 첫날, 혼자 이렇게 말했다. 최대한 서로 괴롭히지 말자. 그냥 내가 사는 곳에 네가 온 것이고, 이제부터 여기는 네가 사는 곳이기도 하니 네가 사는 곳에 내가 사는 것으로 생각하자. 그러니 우리에게 관건은 얼마나 서로를 위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나란히 서로의 생태계를 존중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서로 무심해지면서 존중하자고. 물론 고양이가 내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내가 고양이와 함께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나를 ‘집사’라고 부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친구를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냥 나 사는 데 고양이가 있고 고양이 사는 데 내가 있는 거뿐이여.” 대충 이렇게 대답했다가 잘난 척한다고 재수 없는 인간 취급도 많이 받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사는 방식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사는 대로 살되 부딪칠 수밖에 없는 부분에선 할 수 있는 건 하고 못하는 건 할 수 없으니 그것을 감수한 채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나란히’에 이어 다른 말 하나가 핵심을 차지한다는 것을 배웠다. ‘대면’(face to face)이었다. 나란히 사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옆에 있는 것이기에 고양이의 낯섦을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고양이 습성을 공부한 건 큰 도움이 됐지만 그 지식은 전면에 나설 수 없는, 백그라운드 지식이었다.

상자에도 캔에도 관심 없는 ‘이 고양이’

예를 들어 나와 함께 사는 고양이는 상자에 ‘거의’ 흥미가 없다. 고양이들이 소리만 들어도 공중부양한다는 ‘캔’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늘 시키던 사료 배달이 늦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캔사료를 이틀 먹였는데 고양이가 ‘화’내는 게 눈으로 보였다. 다른 고양이들과 같은 점도 많다. ‘궁디팡팡’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시도 때도 없이 궁둥이를 나한테 들이민다. 물론 한두 번 싫다고 말하면 그냥 가버리는 쿨한 고양이지만 말이다.

배경지식이 무화될 때마다 새삼 깨닫는 건, 이 고양이는 고양이이지만 그냥 ‘이 고양이’라는 점이다. 다른 일반적 특성으로 혹은 특수한 특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친구이다. 섣불리 내가 짐작할 수도,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는 이 친구만의 고유함이 있다는 걸 가끔 지독하게 낯설게 느낄 때가 있다. 그때 이 고양이는 내가 알던 그 고양이가 아니라 전혀 다른 고양이가 된다. “너 이런 고양이였어?”라고 나도 모르게 말하게 된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따르면, ‘대면’이란 타자를 마주하는 유일한 윤리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면하는 건 그저 타자가 아니라 그 타자의 타자성이기 때문이다. 그의 타자성은 절대 내가 아는 지식으로 회수할 수 없다. 그렇기에 타자성이 돌출되는 한 나는 결코 그를 지배, 즉 나로 흡수할 수 없다. 그는 끊임없이 나로 흡수되기를 거부하며 낯선 존재로 솟아오르며 나를 쳐다본다. 나를 쳐다보는 그, 그를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것이 대면이다.

레비나스가 대면의 반대편에 두는 것이 ‘함께’(avec/with)다. 누군가에게 공감하고 연대하고 함께한다는 말을 우리는 좋아하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공감·연대라는 말이 가진 가장 큰 위험은 그것이 어떤 입장이든 그와 나를 ‘같다’고 생각하면 나로 그를 흡수한다는 점이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것 같지만 그것을 내가 흡입해 내 이야기로만 풀어낼 때 그는 사라지고 나만 남는다. 그는 그저 내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한 땔감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함께’에 대한 주장이 결국 “우리가 남이가”로 끝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께는 타자의 타자성과 함께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반대로 함께를 방해하는 타자의 타자성을 경멸하고 증오한다. 통합을 방해한다며 야단치고 타자에게 타자성을 제거할 것을 명령하고 너는 너이면 안 되고 고양이여야 한다. 그것도 내가 아는 고양이. 그 고양이로 순화돼야 한다. 그 지배에 복종해 순화되는 것, 그것을 ‘함께’라고 부른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여기를 떠나야 한다. 여기서 너와 나는 나란히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사는 곳에 네가 얹혀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타자를 제거하는 ‘홀로’

그러나 ‘함께’가 폭력이라고 결국 인간은 ‘홀로’라는 말이 아니다. 홀로 역시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폭력이다. 나는 그 타자성을 만나기 싫으니 내 땅에서 나가라는 말이 홀로다. 타자의 타자성을 제거하는 것이 함께라면 타자를 제거하는 것이 홀로다. 오히려 지금은 함께의 폭력만큼이나 홀로의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이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은 자기 영토에서 추방한다. 국가든 사회든 혹은 동아리든 말이다.

가끔 친구들에게 ‘민주주의자’로 고양이와 함께 살기 더럽게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또 말을 바꿔, 고양이랑 살면서 고맙게도 조금씩 ‘민주주의자’가 돼간다고 한다. 고양이와 함께 살며 깨달은 민주주의란, 아무도 자기가 주인이라 선언하지 않고 모두가 손님임을 깨닫는 생태계였다.

내가 오해하고 있었다. 주권재민의 근본적인 뜻은, 누구도 함부로 주권‘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민주주의는 주권자 자리를 비워놓을 때 비로소 가능했다. 주권자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는 게 아니라, 비워놓고 누구도 함부로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게 민주주의자가 되는 훈련이었다. 그래야지만 ‘홀로’도 ‘함께’도 아니라 ‘대면’하며 ‘나란히’ 하며 ‘삶’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민주주의자 되는 일은 힘들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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