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마음 열 번에 말 한 번

언니가 울산 학교로 떠난 자리에 남은 노래들
등록 2021-04-17 14:41 수정 2021-04-22 02:05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우리 언니는 울산에 있는 학교에 다닌다. 우리 가족은 경기도에 사는데 언니는 울산에 있는 학교에 다니니까 통학은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다. 언니는 2020년 한 해 집에서 온라인수업을 듣더니, 식구가 많아 사생활 금지 구역인 집을 뜨기로 결정했다.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언니는 겨울방학 내내 떠날지 말지 고민했고, 난 그동안 언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가지 마. 내가 잘해줄게. 매주 언니가 좋아하는 마카롱을 준비해줄게…. 떠나기로 결심한 언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열 번 들면 그중에 한 번씩만 입 밖으로 말했다. 유의미한 노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언니가 떠나자마자 엄마가 내게 “떠나간 사랑은 잊어! 엄마가 잘해줄게”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제삼자인 엄마가 보기에도 내 미련이 애절했나보다.

언니는 2주에 한 번씩 집에 온다. 울산에서 집까지 기차표 가격을 생각하면 자주 올 만한 거리는 아니지만, 내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격주로 짐을 싸서 기차 타고 오는 일이 귀찮기도 할 텐데, 언니는 불평하지 않았다.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집에 와서 온라인수업이 일찍 끝난 날에는 아빠와 함께 날 데리러 우리 학교에 오기도 한다. 아빠 차 조수석에 언니가 탄 것을 보면 나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심지어 나와 같이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는 내 옆에서 수업을 듣기도 했다. 언니가 옆에 있으면 행복해지지 않더라도 우울하지 않다. 불안한 마음도 한층 덜하다.

언니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즐거워도 부르고, 불안해도 부른다. 언니가 노래할 수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언니 노래를 들어온 나는, 언니가 노래할 때 음조나 박자의 미세한 변화로도 언니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언니에게 이렇게 중요한 노래를 기숙사 방에서는 부를 수 없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여러 사람이 좁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는데 고성방가로 주변에 피해를 주면 안 되니까. 그래서 언니는 집에 오면 모든 공간에서 노래를 부른다. 내 옆에서, 화장실에서, 씻다가…. 하지만 언니가 마음껏, 목청 높여 부르는 곳은 주로 차 안이다.

일요일 저녁, 마지막 벚꽃을 보러 드라이브를 갔다. 언니는 “기숙사 방에서 못 부르니 지금 부를 수밖에 없다”며 아는 노래란 노래는 모두 불렀다. 오래 함께한 세월만큼 언니와 나는 아는 노래가 많이 겹쳐서 나도 따라 불렀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즐겁게 느껴졌다.

아프기 시작한 뒤, 약의 부작용 가운데 하나로 감각이 예민해져 귀가 너무 따가워서 조용한 것을 선호했다. 식사하다가 숟가락과 놋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거슬려서 귀를 틀어막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시계 초침 소리마저 귓속을 긁는 것 같았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숨으면 비정상으로 울컥거리는 맥박 소리가 날 따라왔다. 소리에 구속당하는 것 같았다. 최근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의 복용량이 대폭 줄었다. 그 영향도 크겠지만 비로소 노래를 듣고 부르는 일이 조금 편해진 이유는, 언니가 온 게 기뻐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배웠고 불렀고 들었다. 노래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는 많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노래가 있는 일상이 너무 당연해서였다. 언니가 학교 기숙사로 돌아간 뒤 내 생활에서 노래가 많이 비어버렸다. 훌륭한 가수가 멋진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를 찾아 듣는 것도 좋지만, 언니 노래는 날것 그대로 언니의 기분과, 언니와 나의 거리와, 우리가 공유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없는 일상은 꽤 허전해서, 버텨내야만 하는 종류의 것이다.

신채윤 고2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