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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으로 시작할 순 없잖아

‘장애인의 날’이면 쏟아지는 장애인 차별 수업, 왜 ‘다르다’는 점만 강조할까
등록 2021-04-12 07:30 수정 2021-04-15 01:08
비장애인 딸과 발달장애인 아들을 쌍둥이로 키우면서 안 것은 둘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비장애인 딸과 발달장애인 아들을 쌍둥이로 키우면서 안 것은 둘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4월20일은 ‘장애인의 날’(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이다. 이날을 전후로 미디어에선 장애 관련 특집 콘텐츠를 우르르 쏟아내고 일선 학교에선 장애인 차별에 관한 수업을 한다. 우리가 자라온 시대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모습이지만 이런 움직임에 마냥 웃을 수만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르다’는 점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장애인은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르지만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아닌데…, 그게 아닌데…. 나는 발만 동동 구른다.

“일단 다름을 인정한 뒤에…”

2018년이었다. 당시 나는 발달장애인 아들과 함께하는 일상을 글로 쓰다 얼떨결에 책까지 낸 새내기 작가이자 이제 막 장애계에 입문해 아는 것보단 배워야 할 게 더 많은 젊은 엄마였다. 교육부에서 강연 의뢰가 와, 특수교사 수백 명 앞에 섰다. 그때 나는 하나의 큰 깨달음이 온 상태였다. 비장애인 딸과 발달장애인 아들을 쌍둥이로 동시에 키우면서 둘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부분을 강조했다. 학교에서 장애 이해(공감)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면 장애인은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부각해달라 했다. 하지만 내 언어는 빈약했다. 이들을 제대로 설득할 ‘나의 언어’를 그때는 정립하지 못했다.

당장 저항이 왔다. 한 교사가 손을 들었다. “저는 어머니 말씀에 반대하는데요. 장애가 있는 우리 애들은 다른 게 맞잖아요. 그런데 왜 다르다고 하면 안 되죠? 모든 아이가 저마다 다르듯 장애가 있는 아이도 다르고, 그 다름을 일단 인정한 다음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닌가요?”

당황한 나는 반론을 펼칠 만한 근거를 찾아 머리를 굴렸다. 대한민국이 어떤 사회인가. ‘같은 것’(학연, 지연)에 유독 더 집착하는 사회다. 공통점이 있어야 무리 안에 받아들인다. 그런데 장애인은 다르다는 점이 먼저 강조되면 이들은 겉돌게 된다. 아웃사이더가 된다. 내 말은 맞는 말이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승리했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 교사를 보며 나는 애가 탔다.

다르지 않다. 같다. 이걸 모두가 먼저 알아야 한다. 출발점이 다르면 파생되는 결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무지와 무관심에서 파생된 ‘편견’, 그 편견에 힘을 실어줄 ‘확증편향’, 확증편향을 통해 공고해진 편견이 실천으로 드러나는 ‘차별’. 편견과 확증편향과 차별은 ‘다르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1968년 미국으로 가보자. 마틴 루서 킹이 살해된 다음날 초등학교 교사 제인 엘리엇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학교에 출근했다. 그는 3학년 학생들에게 고통스러운 실험을 할 생각이었다. 학교가 있는 시골의 마을 주민은 모두 백인으로 구성돼 있어, 학생들은 그동안 흑인을 본 적이 없었다. 엘리엇이 학생들에게 흑인에 대해 무엇을 아는지 묻자 “똑똑하지 않다” “깨끗하지 않다” “자주 싸운다” 등의 대답이 돌아왔다. 동정과 혐오가 혼재한 고정관념. 엘리엇의 실험이 시작됐다.

눈동자 색깔로 차별받았을 때

엘리엇은 반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푸른 눈과 갈색 눈. 오늘은 갈색 눈을 가진 그룹이 푸른 눈을 가진 그룹보다 우월한 날이라고 했다. 갈색 눈은 푸른 눈보다 똑똑하고 멋지기 때문에 운동장에 먼저 나가 놀 고 급식을 먼저 먹으며 교실에서도 좋은 자리에 앉아 수업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갈색 눈 아이들은 푸른 눈 아이들을 깔보는 잔인한 우월감에 사로잡혔고 즐겁고 행복했으며 학업 성취도까지 높아졌다. 반대로 푸른 눈 아이들은 분노하고 슬펐으며 평소에 잘하던 일까지도 버벅거리며 실수했다. 다음날이 되자 두 그룹의 처지는 바뀌었다. 이틀간의 실험이 끝나고 엘리엇은 이제 모두가 평등하다고 했다. 어떤 아이들은 울음까지 터트렸다. 아이들은 단지 눈동자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상황에 처했을 때 느낀 마음을 털어놓았다.

“차별이란 행복한 것과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차별은 하나도 재미있지 않다.” “차별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평생 화난 채로 살고 싶지 않다.” “내가 작은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제인 엘리엇의 차별수업 이야기는 미국에서 여러 차례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으며 국내에선 <푸른 눈, 갈색 눈>이란 책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 이 실험은 인종차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했지만, 푸른 눈과 갈색 눈을 장애와 비장애에 대입해 바라봐도 큰 무리가 없다.

주목할 것은 어제까지 함께 놀던 친구에게 ‘다르다’는 경계가 지어진 순간, 그리고 그 ‘다름’에 의해 한쪽은 우월하고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는 ‘명제’가 모두의 머릿속에 들어온 순간, 아이들이 기꺼이 차별을 실천에 옮겼다는 점이다.

장애 이해, 장애 공감 등의 이름으로 시행하는 모든 노력에 ‘장애인은 다르다’가 강조돼선 안 되는 이유이며, 장애인을 도와줘야 할 안타까운 존재로 레이블링 해서도 안 되는 이유다. 그 순간 경계가 생긴다. 비장애인은 우월하고 장애인은 열등하다는 편견이 입력된다. 편견은 각자의 머릿속에서 확증편향을 공고히 할 증거를 모은 다음, 차별이라는 실천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모두 ‘그냥, 사람’이다

2020년 한 포럼에 참석해 발제했다. 사회복지 계열에서 우리나라 최고라 할 만한 쟁쟁한 교수들이 한데 모였다. 포럼 말미, 사회자가 정리하는 시간. “장애인의 욕구도 비장애인의 욕구와 같군요. 이번 포럼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된 것만도 큰 성과입니다.”

네에?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2020년에 알게 됐다고요? 우리나라 최고 수준 교수들이? 수십 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학생을 배출해온 교수들이 여태까지 장애인은 다르다고 가르쳐온 거예요? 하아.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다르지 않다. 아니, 똑같다. 홍은전 작가의 말처럼 장애가 있든 없든 우리는 모두 ‘그냥, 사람’이다.

글·사진 류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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