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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클로버

귀 기울이면 들릴지도 몰라

봄이 싫었던 내게 봄이 보여준 것들

제1357호
등록 : 2021-04-04 15:58 수정 : 2021-04-0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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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산등성이에는 진달래가 어른거리고 벚꽃은 화들짝 만개했다. 집과 학교만 오가다보면 멈춰서 봄이 오는 것을 만끽할 여유가 없다. 그래도 오늘은 잠깐 짬 내어 창밖을 여러 번 내다봤다. 멀리 핀 벚꽃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겨우내 입에 “난 봄이 오는 게 싫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다들 무언가 시작할 것을 새로이 찾는 모습이 부담스러웠다. 엄마 아빠와 다른 사람들은 내게 좀더 푹 쉬라고 말하지만 새학기가 됐으니까, 이제 3월이니까 하면서 마음을 새로 고쳐먹는 사람들을 보면 조급함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당연히 봄을 즐길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누구보다 봄꽃을 즐기는 버릇이 몸에 배어서인지 슬며시 마음이 들뜬다. 봄만 오면 꽃과 나무와 바쁘게 붕붕거리는 벌들에 시선이 붙들려 걸음이 점점 느려지다가 아예 멈추는 것이 예삿일이었다. 봄이 왔다는 걸 알고 나니 외출할 때마다 조금씩 설렌다.

외출하지 않아도 설레는 일은 있다. 학교 과제로 집 안에서 새싹채소를 기르고 있다. 지난해 초겨울부터 키운 다육식물은 물을 너무 안 준 탓에 말라(!) 죽었다. 내 관리 능력이 부실한 것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지만, 변명하자면 사람들이 물을 주지 말라고 강조하기에 물을 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그래도 한 생명을 죽였으니 그 죄책감이 가슴을 콕콕 찌른다. 나름 추모의 시간을 가졌고 그 친구(다육식물)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씁쓸하고 슬퍼서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다. 다시 새싹으로 돌아가서, 보리와 청경채와 무순 씨앗을 심었다. 여섯 시간 정도 물에 불렸다가 플라스틱 용기 바닥에 물에 적신 종이타월을 깔고 씨앗을 흩뿌려놓았다. 심고 나서 이틀 정도는 빛을 보지 않도록 했고, 지금은 오돌토돌한 싹이 얼굴을 빠끔 내민 모습을 보며 아침저녁으로 흡족해하고 있다. 촉촉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대서 분무기로 물을 칙칙 뿌려준다.

크리스마스 접시에 보리 씨앗을 뿌려놓았는데, 접시가 너무 얕아 파종 뒤 사흘 만에 다른 플라스틱 용기로 옮겼다. 그 과정에서 실낱같은 뿌리가 나온 씨앗 몇몇을 들어 다른 자리에 놓으려 했더니, 그새 뿌리가 꽤 깊게 박혀 잘 들리질 않았다. 혹여나 뿌리가 다칠까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분리 수술을 해야 했다. 오른쪽 뿌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힘을 강하게 줘서는 안 돼. 천천히, 서서히. 잠깐, 그러다 앞쪽 뿌리가 잘리겠어! 혼자 가느다랗고 흰 뿌리줄기와 사활을 건 싸움을 벌였다.

나무는 씨앗이 땅에 묻히면 뿌리를 뻗어 입지를 공고히 한 뒤 새싹을 틔워 위로 향한다. 교과서에서도, 몇 권 읽지 않은 자기계발서에서도 눈이 따갑도록 읽은 말이다. 뿌리를 얼마나 단단히 내리는지, 그것이 얼마나 질긴지 이번에 직접 확인했다. 뿌리를 종이타월에서 떼어낼 때 가장 강하게 든 생각이 ‘이래도 되는가’였다. 내가 이미 여기서 살기로 결심한 이 아이를 감히 옮겨도 되는 걸까? 아직 제대로 싹이 트지 않은 씨앗의 의지에 비해, 옮기려는 내 결심은 얼마나 가볍고 순간적이며 천진한 발상이었는지. 우여곡절 끝에 이식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잘 자리잡을지 며칠 지켜봐야 한다.

저 무해한 것들은 너무 고요해서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잠을 방해하지도, 내 할 일을 하는 중에도 시끄럽게 칭얼거리지 않는다. 귀를 잘 기울이면 발아하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을 포착할 만큼 섬세하고 예민한 청력이 없어 아쉽다. 이 조용한 이웃은 거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자기 할 일을 한다. 내가 기울인 관심만큼 나를 보살피진 않지만 급수한 만큼 빨아들이고 자라난다. 새싹은 나에게 삶을 기대고 나는 새싹 옆에 가만히 휴식이 필요한 마음을 한숨 한 자락에 담아 내려놓는다. 새싹을 잘라 거두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동거를 이어갈 것이다.

신채윤 고2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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