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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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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의 ‘양심’이란 무엇인가

‘유죄’ 판결 받은 비종교적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법원이 자의적 기준에 따라 양심 선별”
등록 2021-03-06 12:58 수정 2021-03-11 00:42
2021년 2월2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 대법원 선고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이 열렸다. 비폭력 신념을 이유로 입대를 거부한 병역거부자 홍정훈(왼쪽 둘째)·오경택(왼쪽 넷째)씨 등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2021년 2월2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 대법원 선고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이 열렸다. 비폭력 신념을 이유로 입대를 거부한 병역거부자 홍정훈(왼쪽 둘째)·오경택(왼쪽 넷째)씨 등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평화는 가둘 수 없고, 양심은 처벌할 수 없다.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 인정하라!”

2021년 2월25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동문 앞에서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 홍정훈·오경택씨가 이렇게 외쳤다. 이들을 지원하는 참여연대·전쟁없는세상 등 시민단체 회원들은 두 사람과 함께 대법원 선고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날 대법원은 예비군 훈련 거부자 ㄱ씨에게는 무죄를, 홍씨와 오씨에겐 유죄(1년6개월 징역형)를 확정했다. 하급심과는 다른 결과를 기대했던 홍씨는 충격에 빠졌다(19쪽 상자기사 참조).

병역거부자 ‘무죄’ 흐름 생겼지만

병역법에 대해 2004년·2011년 합헌 결정을 내렸던 헌법재판소가, 2018년 6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같은 해 11월, 대법원도 대법관 13명이 모두 참여하는 전원합의체를 열어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기존 유죄 판례를 무죄로 변경했다. 이 흐름에 따라 자신이 믿는 종교를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이들은 잇따라 무죄판결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유죄판결을 받는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있다. 종교가 아닌 평화적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인데, 자신의 양심을 증명하기 쉽지 않은데다 양심을 판단하는 명확한 기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면 이는 병역법 제88조 제1항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며 병역거부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진정한 양심’이란 개념을 내세웠다. 이후 관련 재판은 진정한 양심을 인정할 수 있는지를 따져 병역거부자의 유무죄를 판단해왔다.

홍정훈·오경택씨는 ‘진정한 양심’을 인정받지 못했다. 홍씨는 2016년 12월 “폭력을 내면화하는 군대에 비폭력 수단으로 저항하겠다”며 현역병 입영을 거부했다. 오씨는 “국민을 향해 작전하고 학살하는 군대에 들어갈 수 없으며 총을 잡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2018년 6월 입대 거부를 선언했다.

병역법 위반 혐의로 법정에 선 두 사람은 1·2심에서 각각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상고했다. 대법원은 홍씨의 경우 “병역거부가 비폭력·평화주의보다는 주로 권위주의적 군대문화에 대한 반감 등에 기초하고 있어 양심적 병역거부의 사유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오씨에 대해선 “모든 전쟁이나 물리력 행사에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고 목적, 동기, 상황에 따라 전쟁이나 물리력 행사에 가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경우도 있다. 2017년 현역병으로 입영하라는 통지를 받았지만 입영하지 않은 시우(활동명)씨가 그렇다. 성소수자로서 남성성을 강요하는 또래집단 문화에 반감을 느껴왔던 그는, 대학 입학 뒤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하며 ‘퀴어 페미니즘’을 연구했다. 이같은 활동 내용을 제출하자, 2020년 11월 의정부지법(2심)은 “적어도 2010년부터 주변에 병역거부 의사를 표시했고, 대법원 판결 이전에 형사처벌을 감수하면서도 병역거부를 선택했고, 대체복무제를 이행할 의지가 있다”며 ‘진정한 양심’이라 판단했다. 검찰이 상고해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깊고, 확고하고, 진실할 것

홍정훈·오경택씨가 유죄를 받던 날인 2월25일, 비종교적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첫 무죄가 확정되기도 했다. ㄱ씨는 2013년 군에서 만기 제대한 뒤 예비군 훈련 참여를 거부해왔다. 수년간 여러 차례 조사와 재판을 받으면서 안정된 직장을 구할 수 없어 일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법원은 그가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로 인해 고통을 겪은 어머니 아래 성장하면서 폭력에 경각심을 가졌고, 미군이 헬기에서 기관총을 난사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뒤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신념을 키웠다고 판단했다. 어머니의 설득으로 군에 입대했지만 사람에게 총 쏘는 행동이 양심에 반함을 깨달았다는 점도 인정했다. 대법원도 “ㄱ씨의 예비군 훈련 거부가 양심에 의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무죄를 확정했다.

이처럼 병역거부자의 유무죄를 가른 것은 ‘진정한 양심’을 인정할 수 있는지였다. 대법원은 ‘진정한 양심’에 대해 “그 신념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하여야 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보면, 신념이 깊다는 것은 “사람의 내면 깊이 자리잡은 것으로서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라고 했다. 신념이 확고하다는 것은 “유동적이거나 가변적이지 않다”는 뜻, 신념이 진실하다는 것은 “거짓이 없고 상황에 따라 타협적이거나 전략적이지 않다”는 뜻이라고 부연했다.

종교적 이유로 병역거부를 할 때 진정한 양심을 판단할 기준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종교의 구체적 교리가 어떠한가 △그 교리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명하는가 △실제 신도들이 양심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고 있는가 △그 종교가 피고인을 정식 신도로 인정하고 있는가 △피고인이 교리 일반을 숙지하고 철저히 따르고 있는가 △피고인의 신앙 기간과 실제 종교적 활동 등은 어떠한가.

상상 속 양심 묻는 ‘십자가 밟기’

그러나 비종교적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판단 기준이 없다. 이 때문에 검찰은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 시민단체 활동 이력과 해당 단체의 정관, 가정환경과 성장 과정, 사회 경험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병역거부자에게 요구해왔다. 이 자료에 어떤 내용이 담겨야 진정한 양심을 증명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법원은 홍씨에 대해 “병역거부 이전에 양심적 병역거부나 반전·평화 분야에 활동한 구체적인 내역이 아무것도 소명되지 않았다. 참여연대 간사 활동의 주요 분야도 사회권과 주거권이었다”며 유죄를 판결했다. 하지만 홍씨를 변호한 임재성 변호사는 “비폭력 평화주의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하여, 반드시 ‘반전’ ‘평화’ 운동을 직업으로 삼아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 신념은 ‘진정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박했다.

게다가 재판 과정에서 ‘가정적 상황’을 들어 진정한 양심을 검증해갔다. 검찰은 법정에서 오씨에게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총을 든 것은 폭력행위라고 생각하는가”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때 대항해 집총하는 것은 양심에 반하는가”라고 물었다. 일본 에도 시대에 막부가 천주교 신자를 가려내기 위해 ‘십자가 밟기’(후미에)를 강요한 것과 비슷하다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재판부는 검찰 쪽 신문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오씨는 “지금의 제 신념으로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으나, 당장 그 장면에 가서는 어떻게 판단하고 움직일지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답했다. 이를 근거로 법원은 “현재 가지고 있는 자신의 생각이 바뀔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했다”며 “오씨의 양심은 유동적이고 상황에 따라 타협적이거나 전략적이어서 양심적 병역거부에서 말하는 양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병역거부자 활동 검증 방식 바뀌어야”

전쟁없는세상 이용석 활동가는 “법원은 양심이 진실한지 아닌지 판단하지 않고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진짜 양심과 가짜 양심을 선별해내려 한다”고 비판했다. 임재성 변호사는 “병역거부자가 평화적인 글을 많이 써왔는지, 반전 관련 시민단체 활동을 했는지 등을 따지는 포지티브 방식이 아니라 이에 배치되는 활동을 했는지 살펴보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법원이 진정한 양심을 판단해야 한다”며 “평화적 신념이 20대 중후반에 생기거나 시민단체 활동이 아닌 일반 직장을 다니다가 생길 수도 있는데, 현재의 포지티브 방식대로라면 비종교적 병역거부자가 ‘진정한 양심’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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