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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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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삿바늘이 들어가자 뜨거운 불기둥이...

CT 검사하고 병원에서 들은 두 개의 소식
등록 2021-03-06 00:32 수정 2021-03-06 01:19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2월15일에는 거의 1년 만에 병원에 가서 컴퓨터단층촬영(CT)을 하고 왔다. 혈관까지 다 비추도록 찍어야 하는 나는 일반 채혈 주삿바늘보다 조금 더 굵은 바늘을 꽂아서 촬영 중간에 ‘조영제’라는 약물을 투여한다. 이 약물은 주삿바늘로 혈관에 주입돼, 몸을 통과한다. 그걸 느낄 수 있다. 병원에서 설명하기를 ‘약간 타는 듯한 감각’이 느껴질 수 있다는데, 뜨거운 불기둥이 혈관을 핥는 기분이 든다. 세 번째인데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굵은 바늘도, 조영제가 몸을 훑는 감각도. 조영제를 투여할 때 오른팔 혈관이 잘 잡히지 않아서 왼팔에 주삿바늘을 꽂아야 했다. 2월19일 CT 결과를 확인할 겸 다시 병원에 가서 채혈 검사를 하고 주사약을 세 시간 정도 맞아야 하기에 주로 쓰는 오른팔 대신 왼팔은 그때를 위해 남겨두고 싶었 는데.

마침내 19일이 왔다. 아물지 않을 줄 알았던 상처가 아물었다. 왼팔에 다시 주삿바늘을 꽂을 수 있었다. 날아간 줄 알았던 기회가 다시 돌아왔다. 오랜 시간 주사약을 맞고 나서 CT 검사 결과를 보는 진료가 있는 오후 4시30분까지 기다렸다. 지루한 마음이 야속하게 대기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밤 9시가 거의 될 때 진료를 마치고 나올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내 몸의 단면을 촬영한 검은색 사진과 색깔이 있는 상반신 사진을 보여줬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염증이 많이 줄었다고 했다.

나는 어떤 사진이 좋아진 건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1년 전 사진과 이번 사진을 나란히 두고 보면 분명히 차이가 있었고, 그게 내 몸이 ‘좋아짐’을 표현한 변화라니 기쁘게 받아들였다. 하루가 다르게 차도가 보이고 몸이 가뿐해지는 등 내가 알아보기 쉬운 ‘신호’는 없었지만, 조용히 그러나 성실히 치료되고 있었나보다. 계속 두 달에 한 번 주사를 맞고 진료받아야 하지만 또 약이 줄었고 그래서 홀가분했다.

진료가 그렇게 늦어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날이 1년 동안 진료해주신 의사 선생님의 마지막 근무일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진료 내용을 들은 부모님이, 내가 그분께 많이 의지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괜찮냐고 물었다. 물론 많이 의지했다. 의사 선생님은 약 부작용으로 고생하던 내게 약을 끊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셨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상담 선생님을 연결해주셨고, 진료받는 내내 늘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해주셨다. 그러니 당연히 서운함은 있다.

그렇지만 나는 늘 인생이 내가 자아내면서 나아가는 실이나 면직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것과 일부 겹치거나 얽혔다가 떨어지기도 할 것이다. 내 인생과 잠깐 맞닿았던 의사 선생님의 삶이 다시 흘러간다.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과 기억과, 어쩌면 헤어짐이 불러온 서운함마저도 새로운 색깔로 내 삶에 남겨놓고서. 그러니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 오는 의사 선생님에 대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병이 나아지고 약을 더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며칠 머리가 훨씬 가볍고 단순해진 것 같았다. 다가오는 새학기, 더 바빠지고 일상이 몰아칠 텐데 견뎌낼 수 있을지 불안해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는데, 병이 나아진다면 한 학년을 기꺼이 버텨내겠단 희망을 품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겠다고 생각했다. 내 일상을 지배하다시피 하는 걱정거리가 약간 가벼워진 것만으로도 생각이 이렇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니. 어떻게 하면 몸과 생각에 더 큰 자유를 줄 수 있을지, 즐겁게 고민하게 되었다.

신채윤 고2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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