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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4시 퇴근

등록 2021-02-13 15:27 수정 2021-02-17 01:05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6시 퇴근 뒤 집에 도착해서 대충 씻고 밥을 차려 입에 숟가락을 넣으면 7시30분쯤 된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하면 8시가 훌쩍 넘어버린다. 헬스장이 다시 문을 열었지만 밤 9시까지라 갈 엄두를 못 낸다. 듣고 싶은 글쓰기 강좌가 있어 신청했는데,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 시작해 딱 9시에 마쳤다. 퇴근해 시간에 맞춰 교육 장소에 도착하려면 저녁을 거르거나 빵 쪼가리로 대충 때울 수밖에 없다.

수업을 마친 선생님은 한탄하며 수강생들과 소주 한잔을 하고 싶은데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소주는커녕, 수업을 마친 밤 9시에는 모든 식당이 문을 닫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빠르게 발을 굴려야 한다. 동네 마트와 대형 마트는 밤 9시 전에 먹거리를 사려는 직장인이 한꺼번에 몰려 인산인해를 이룬다. 만약 서울로 출근하는 경기도민이라면, 퇴근하고 집에 오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것이다.

24시간 돌아가는 세상은 얼마나 끔찍한가

밤 9시 이후 영업 제한을 불평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깜깜한 밤에는 도시도 잠을 자는 게 인간적이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고 돌아가는 세상은 얼마나 끔찍했던가. 2차, 3차까지 이어지는 회식과 술에 취한 직장 상사를 일으켜 택시에 태워 보내는 일은 전쟁 같은 야간근무다.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도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는 직장인은 성실함의 상징처럼 묘사됐지만, 그 가족도 같은 생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본사의 24시간 영업 강요로 과로사 했던 편의점주의 슬픈 이야기는 ‘새벽배송’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이어진다. 코로나19 이전 배달라이더들의 노동조합 ‘라이더유니온’의 주요 활동은, 라이더들의 퇴근시간인 밤 10~11시에 조합원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심지어 총회를 새벽 시간에 진행하기도 했다.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요즘은 그 시간에 만날 장소가 없어 밤 모임과 술 약속이 사라졌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열심히 활동하다 보니 체력이 좋아지고, 애인과 보내는 시간도 늘었다.

물론 밤 9시에 문 닫고 집에 가야 하는 자영업자의 고통을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밤 9시 이후 영업 제한을 쉽게 받아들일 자영업자는 없을 것이다. 밤 9시 이후 영업 제한을 바꿀 수 없다면, 노동자들의 퇴근시간을 한 시간 당기면 어떨까? 6시가 아니라 5시에 퇴근한다면, 식당과 마트를 좀더 일찍 방문할 수 있고 방역 지침을 지키며 운동도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퇴근시간이 분산돼 지하철과 버스에서의 끔찍한 밀접접촉을 줄이고, 교통체증 역시 완화돼 자영업자의 영업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퇴근시간은 그대로 둔 채 영업시간만 줄이면 방역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소비할 수 있는 제한된 시간에 많은 사람이 호프집으로, 식당으로, 마트로 몰리기 때문이다. 퇴근시간을 오후 4시로 단축한다면 더 좋은 방역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19를 종식할 수 없다면

사실 대한민국 자영업자가 밤늦게까지 영업해야 했던 이유는, 대한민국 노동자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야간노동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집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24시간 밥을 먹여주는 식당, 24시간 운동하는 헬스장, 24시간 노래 부르는 노래방이 있다. 오래오래 일하라고, 배불리 먹이고 체력을 증진하고 스트레스도 풀게 해주는 것이다.

코로나19를 쉽게 종식할 수 없다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사회시스템부터 고치면 어떨까. 자영업자의 희생만 강요하면 지속가능한 방역은 불가능하다. 가게 셔터를 내리는 시간과 연동해서 공장과 회사의 셔터도 일찍 내려보자. 가끔 외국의 노동현실을 번역한 책을 읽는데, 거기엔 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이 상식적으로 적혀 있었다. 어쩌면 코로나19 이후가 아니라, 코로나19 이전 세상이 이상했던 게 아닐까.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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