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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책임을 묻고 책임에 응답할 책임

등록 2021-01-25 14:30 수정 2021-01-26 02:19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무언가를 오래 했다는 이유로, 또는 해본 적 있다는 이유로 전보다 더 ‘높은’(?) 직책을 맡을 때가 있다. ‘높은’ 직책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감당할 깜냥이 안 되는 일을 덜컥 맡은 다음 두고두고 짓눌릴 때가 많다.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겁이 많아서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조직은 개인보다 크고, 상황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여러 사람과 연결돼 일해야 할 때, ‘누구나 자기 행동에 책임져야 한다’는 당연한 윤리가 정확히 어떻게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점점 어렵게 느껴져서다.

더 많은 권한을 더 많은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더 많은 ‘권력’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많을 때 우리 사회가 좀 나아질까 묻는다면, 후자를 택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책임을 진다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하고 배울 수 있는 예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타인의 무책임을 비판한다 해서 저절로 내 책임을 배우는 것도 아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

“책임지고 사과하라!” “책임지고 물러나라!” 공적인 세계에서 책임은 누군가의 잘못을 분명히 따져 묻고 그에 따르는 응당한 행동을 촉구할 때 주로 등장한다. 일이 잘 굴러갈 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있을 때 책임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어떤 잘못이 확인됐을 때, 그가 그 자리에서 져야 하는 책임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진지한 비판과 치열한 토론이 필요해진다. 사실 우리는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심지어 엉뚱한 방식으로 ‘책임지겠다’는 사람도 꽤 많이 봐왔다. 피해자가 아니라 “국민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했던 수많은 성범죄 공직자가 대표적이다(심지어 “대통령께 죄송하다”던 사람도 있었다).

책임에 대해 제대로 사유할 수 없게 하는 요소는 도처에 있다. 자기연민, 남 탓, 변명, 진영논리, 조직논리… 나라고 예외라고 자신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특히 조직논리나 진영논리 안에 있으면 그 사실 자체를 모르기 쉽다. 이래서 어쩔 수 없고, 또 저래서 어쩔 수 없다. 최선은 항상 불가능하고, 차악을 차선이라 여기게 된다. 그래도 그 와중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다. 그래서 ‘사회적’ 책임에 대해 다시, 더, 계속, 함께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책임은 정확한 방향과 이유로 질 때 의미가 있다. 책임을 묻고 책임을 지려는 질문과 응답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지탱할 수 없다.

‘사회적 책임’이 사회를 만든다

박원순 전 시장의 ‘선택’, 여성단체 대표와 여성운동 출신 의원의 ‘유출’, 여성단체 내부의 징계와 토론, 성찰과 성명서, 2차 가해의 뻔뻔함, 피해자의 입장 발표, 남인순 의원의 침묵…. 어떤 의미로든, 지금 한국의 페미니스트 중에서 자신이 이 상황의 ‘바깥’에 있다고 느끼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천근 같은 무거움 속에서, 그 무거움을 온몸으로 겪고 있을 이들을 떠올리며, 나 역시 ‘책임’에 대해 생각한다. 물론 이 와중에 신나게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이 좀 꼴사납긴 하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책임은 권한, 책무, 사회적 위치에 따라 지는 것이지, 비교급이나 덧셈 뺄셈하여 지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왜 민주당한테만 난리냐, 그러는 국민의힘은?” “죄는 중하나 그간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므로 집행유예를 판결한다.” 이런 식의 논리가 이 사회를 얼마나 망쳐왔던가.

사회적 책임은 사회로부터 오고, 또한 사회를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식으로 책임지는가는 그가 누구를 준거 삼고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인가를 보여준다. 아무리 큰 충격, 실망, 곤혹에도 항상 ‘그다음’이라는 것이 있다. 책임을 정확히 묻는 것. 그리고 그 물음에 제대로 응답하는 것. 함께 그렇게 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에게 냉소나 환멸이 아닌 ‘그다음’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전희경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옥희살롱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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