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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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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르포] K방역의 K는 지금 어딨나요?

코로나19 감염 진원지처럼 지정당한 뒤 솔선수범 방역 협조했지만,
돌아온 것은 매출 감소와 폐업
등록 2021-01-24 13:44 수정 2021-01-26 05:59
서울 용산구 이태원 상인들이 이태원 중심 상가 거리인 세계음식문화거리에 코로나19 방역 지침의 합리적인 조정과 배상을 요청하는 펼침막을 내걸고 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 상인들이 이태원 중심 상가 거리인 세계음식문화거리에 코로나19 방역 지침의 합리적인 조정과 배상을 요청하는 펼침막을 내걸고 있다.

2007년 겨울, <한겨레21> 제690호에 기사 하나가 실렸다. ‘이태원은 누구의 땅인가’. 그 시절, 서울 이태원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은 차고 넘쳤다. 이태원은 모슬렘(이슬람교도)의 땅이었고, 나이지리아인의 땅이었고, 해외 유학 세대가 외국 경험을 재확인하는 땅이었고, LGBTQI가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땅이었고, 언더그라운드 예술인이 교류하는 땅이었다. 모두의 땅이었고, 누구의 땅도 아니었다.
2021년 겨울, 이태원을 두고 코로나19 1년의 기억만 떠올리는 일은 참담하고 자연스럽다. 2020년 5월 나온 ‘이태원발 코로나19’라는 단어는 강력한 낙인이었다. 클럽, 밤, 성소수자, 개방성, 외국인… 이태원을 둘러싼 많은 것을 코로나19와 접붙여 풀이했다. 그럴수록 ‘보상 없는 기본권 제한’은 마땅한 듯 여겼다. 5월 이후 코로나19가 확산하는 매 시점, 클럽 등 유흥업소 영업을 정지했다. 카페와 음식점 영업시간을 규제했다. 이해했다. 다만 손실에 대한 보상은 제도화하지 않았다. 2019년 4분기 19.9%이던 이태원1동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2020년 2분기 29.6%까지 치솟았다. 2020년 3분기 이태원 관광특구 주점들 추정 매출액은 한 해 전보다 66.5% 줄었다.
2021년 1월9일 이태원은 다시 코로나19 방역 논란의 중심에 섰다. 상인들이 거리로 나왔다. 여전히 ‘코로나19 방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은 잊지 않았다. 다만 실효성 있고 현실적으로 방역 지침을 조정해달라고 했다. 합리적인 얘기였다. 헬스장, 학원, 피시(PC)방, 수영장, 돌잔치 업계도 더는 못 참고 목소리 냈다. 서울시장 후보들과 국회의원이 이태원을 찾았다. 국회는 영업정지 기간의 손실액을 보상하고, 임대료를 감면하는 방안을 뒤늦게 찾는다. 기준을 두고 아직은 논쟁한다. 당장 해결된 것은 없다.
“우리, 기자회견 잘된 걸까요?” 영업을 멈춘 이태원의 한 레코드바에 앉아 어느 상인이 물었다. 그의 작은 클럽은 2020년 365일 가운데 254일을 쉬었다고 했다. 월세를 무작정 보증금에서 깎고 있다. 국내외 새로운 문화를 전하고 앞서가는 아티스트들이 교류하는 공간이라고 자부했는데, 정책 안에서는 그저 유흥업소다. 정부 지원 대부분을 받지 못했다. 자유로워서 다양할 수 있었고, 다양한 게 자산인 이태원의 의미, 그런 공간을 지키는 게 우리 공동체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한참 이야기했다. 그리고 끝내. “차마 이름을 밝히기 어려울 것 같다”고 미안한 듯 덧붙였다. 차고 넘치게 말할 수 있는 거리와 가게의 의미가 ‘이태원발 코로나19’, 그 낙인 안에서 잘못 풀이될까 두려웠다. 고통스러웠다. 고통을 호소하는 일은 여전히 두려웠다. 낙인은, 그런 것이었다. _편집자주

폭설의 여파가 만만치 않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 소방서 뒷골목 술집 간판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전동드라이버로 조이고 바로잡는다. “배관이 얼어버린 가게가 있어서 도와주러 가고 있어요. 엎친 데 덮쳤네요.” 또 다른 상인은 수화기 너머 다급하게 소식을 전한다. 장사할 수 없어도, 날이 궂어도, 사람이 없어도 ‘이태원스러움’을 자아내는 가게만큼은 보살펴야 했다.

서울 지하철 녹사평역부터 한강진역까지 약 1.5㎞. 생각보다 작은 상권이 코로나19 1년 동안 짊어진 짐은 유난히 무거웠다. 2020년 5월부터 두어 달 이어진 코로나19 확산에 무심하게 ‘이태원발’ 이름이 붙었다. 피해야 할 거리가 됐다. 2021년 1월9일 더는 버티기 어렵다고, 방역 지침을 합리적으로 조정해달라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관심이 집중됐다. 해결된 것은 아직 없다. 1월12일에서 18일까지 거리에서 상인들을 만났다. 흔들리는 가게는 자영업자를 넘어 우리 모두한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 ‘케이(K)방역’이라는 명분 앞에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인가? 이태원 상인들은 차례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1. 해방의 공간이 휘청거린다

“뉴욕은 훌륭한 곳이에요. 그래서 온 거예요. 깨끗해서 온 건 아니에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다큐멘터리 <도시인처럼>

DJ코난(본명 임동욱)은 이태원 퀴논길 주변에서 10년째 술집 겸 라운지바 ‘화합’을 운영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이태원을 대표하는 DJ’로 불린다. 이태원 곳곳 클럽을 무대 삼아 활동하고, 올바른 클럽 문화를 이끌기 위해 만든 한국클럽문화개선협회 아티스트들과 이태원의 흥미로운 가게를 소개하는 티셔츠를 만들어 전세계에 팔기도 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니다. DJ코난한테 이태원에 얽힌 첫 기억부터 듣는다.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없어진 클럽 ‘바 나나’(Bar nana)를 묘사한다.

바 나나는 해밀톤호텔 근처 지하에 있었다. 물이 새는 건지 퀴퀴한 냄새가 났다. 한눈에 들어오는 좁은 공간 안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외국인이다. DJ 부스에서 레게음악이 흘러나온다. 사장이 당시 레게에 꽂혀 있었다. 누구든지 어울려서 자기가 아는 음악, 패션, 미술 얘기를 한다. 흥이 오르면 DJ 부스 뒤에 놓인 타악기 ‘젬베’와 ‘콩가’를 친다. 그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그렇게 빠져들었다. “와, 이건 뭐지? 뭐지? 하면서 자유로운 느낌에 쏙 들어갔어요. 틀에서 해방된 느낌이었어요.”

전세계 바퀴벌레가 다 있던 곳

1990년대 초반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당대의 춤꾼이 모이던 이태원은 한동안 활력을 잃었다. 2000년대 이후 서울 다른 지역이 상업적인 모습으로 변해갔지만, 침체한 이태원에는 ‘언더그라운드 정신’이 깃든 가게가 하나둘 생겼다. DJ코난이 바 나나를 발견한 시점이 그즈음이다. 스무 살, 이태원에서 첫 자취를 시작했던 이태원 카페 ‘쉼’의 심혁 사장은 “냄새도 좀 나고 전세계 바퀴벌레가 다 있기는 했는데, 그게 또 멋”이었던 동네로 2000년대 중반 이태원을 기억한다. “포장마차에 앉아 있으면 외국 사람, 성소수자 가릴 것 없이 두런두런 얘기하면서 밤새우기도 하고요.”

요컨대 자유와 다양성, 개방성을 휘감은 동네. 이런 공간은 서울에도 흔치 않다. 애초부터 국적·인종·성적지향이 다양한 이들이 얽힌, “한국 내에서 보기 드문 다문화 도시 지대”(송도영, ‘도시 문화 구역의 형성과 소통의 전개 방식’)라는 오랜 유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외국인과 외국 경험이 풍부한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놀거리, 먹을거리가 움텄다. “이태원 지역은 ’내 스타일’의 사업을 꾸려나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허락한 장소인 동시에 자유로움에서 비롯된 독창적 행위를 인정하는 소비자 계층이 존재하는 곳이다.”(경신원·정규리, ‘이태원 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한때 예찬했고, 지금 잠시 힘들어도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라고 DJ코난은 믿는다.

2020년 5월6일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라는 표현이 돌기 시작했다. ‘용인-66’으로 불린 확진자가 이태원 클럽을 방문했고, 이태원 방문자 96명이 감염됐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국 곳곳에서 n차 감염이 나오는 매 순간, 두 달 가까이 이태원은 끊이지 않고 소환됐다. 정작 이태원 자영업자 가운데 확진자는 거의 없었다. “한 도시도 아니고 어느 지역을 그렇게 특정해서 감염병 이름을 붙여 부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정작 이태원 상인들은 걸리지 않았는데도요.”(심혁 사장)

이태원만의 특별함으로 여겼던 모든 것도 “반쯤은 혐오 수준”(DJ코난)으로 느껴질 만큼 비난받았다. 확산의 시작점으로 게이클럽을 강조한 기사들은 성소수자 문화를 직접적인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앞서가는 문화를 전하고 만들어온 언더그라운드 클럽은 구분 없이, 그저 문란한 곳으로 매도됐다. 외국인과 새로운 문화에 열린 태도도 삼가야 할 것으로 여겼다.

“반쯤은 혐오 수준”의 비난이 꽂히고

상인들은 코로나19 종식을 누구보다 바랐다. ‘몰상식’ ‘문란’ ‘민폐’ 같은 비난이 답답했고 두려웠다. 일단 숨죽였다. 책임감과 두려움을 안고 열심히 정부 대책을 따랐다. 법에 근거는 있었으나 ‘이태원발’ 낙인 이전까지 조심스러웠던 자영업자 영업정지 같은 강제 조처가, 5월9일 서울시의 유흥업종 영업 정지를 시작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상인들은 요청받지 않은 손실도 감수했다. 소독제를 뿌리며 방역 봉사 활동을 했다. 머리 위로 크게 ‘○’를 그리며 확진자 제로를 기원하는 챌린지도 했다. 클럽들은 이태원에서 한 해 최대 대목인 핼러윈(만성절 전날인 10월31일에 행해지는 축제)의 유흥을 자제해달라는 내용의 영상을 만들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돌아보면 그런 희생을 “모두가 너무 당연히 여겨서 정부도 정밀한 고민 없이 영업을 금지한 것만 같다”.(이호성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 상임 부회장) 보상은 없었다.

그렇게 보낸 1년 끝에 “내 활동 장소가 돼주기도 했고 추억이 담겨 있던 공간들이 휘청거린다. 이미 매각한 곳도 있고, 사명감으로 버티는 곳도 있다”.(DJ코난) 뒤집어 말하면 국내 최고 수준의 DJ인 코난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가게들이 그만큼 사라졌다. DJ코난의 가게 1년 적자도 따져보니 2억원 가깝다. 그나마 모아온 돈으로 버틸 수 있어 불평하기조차 머쓱하다. 한층 안타까운 건 거리 풍경이다. “어느 날 창밖을 보는데 거리에 온기가 없어 보였어요. 그래서 DJ 부스를 창가로 옮기고 스피커도 길 쪽으로 돌렸어요. 거리의 온도를 음악으로 높이고 싶어서.”

카페 ‘쉼’의 심혁 사장이 가게 탁자를 소독하고 있다.

카페 ‘쉼’의 심혁 사장이 가게 탁자를 소독하고 있다.

#2. 합리성과 공정함을 바란다

“이상하잖아요. 왜 이분이 피해를 봅니까.”

-조광진 작가, 웹툰 <이태원 클라쓰>

거리의 다양한 풍경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오시난 회장한테도 있었다. 이태원에 터키 레스토랑 6개를 운영한다. 터키에서 공부하러 한국에 와서 2008년 귀화했다. 2009년 이태원에서 식당 사업을 시작해, 전국 16개 매장으로 확장했다. 180명을 고용한 중소기업 규모로 키웠다. 코로나19 앞에 사업 규모를 크게 줄였다. 4개 매장을 폐쇄했다. 한 달 1억원씩 나오는 적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지금은 직원 70명만 남겼다. 한국 직원을 내보냈다. 터키에서 고용해 불러온 요리사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당장 형편이 어려운 걸 알면서도 해외 유학생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근무시간도 줄였다. “직원들, 그 가족들까지 친하게 지냈거든요. 그런 사람들 내보낼 때 심정이라는 것은, 정말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이태원 매장도 인력을 줄였지만 다른 곳처럼 완전히 폐업할 수는 없다. “시작점이니까요.” 시작점, 1997년 학생 시절 오시난 회장은 매주 금요일이면 이태원에 왔다. 모슬렘(이슬람교도) 예배가 있는 날이다. “2000년쯤 첫 할랄(이슬람 율법에 의해 모슬렘이 먹고 쓸 수 있도록 허용된 제품) 식당이 생겼어요. 늘 자리가 없어 눈치 보다가 자리 나면 얼른 달려가서 앉았어요.” 그런 이태원에서 케밥 가게로 음식사업을 시작한 건 자연스럽다. “최종 목표 고객은 한국 사람이었지만 한국인 대부분한테 당시 터키 음식이 익숙하지 않았어요. 일단 이태원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시작하면서 저변을 넓혀가려고 했어요.” 성공적이었다. 음식문화에 관해서라면 이태원에서 시작해 사회 전반에 번져가는 일종의 공식이 자리잡았다. “이태원 외국인 이주자의 경우 새로운 문화를 주류 사회에 전파하는 문화 전파자의 역할을 한다.”(정지희, ‘멀티에스닉 시티 소비공간의 형성과 지역 활성화’)

사업이 잘될 때 한 해 내던 세금 10억원

사업을 키우며 한국에도 적잖은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사업이 잘될 때 한 해 낸 세금만 10억원을 가뿐히 넘었다. “그게 무척 자랑스럽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 정부에 서운한 마음을 오시난 회장은 조목조목 짚는다.

“우리 대한민국이 얼마나 잘사는 나라인가요. 코로나 관리 잘했어요. 내 목숨을 지켰죠, 인정해요. 방역 성과가 상대적으로 좋으니 경제도 선방했고, IT 대기업, 바이오 기업들은 코로나 덕분에 더 잘나가고 있어요. 이런 나라, 세계에 한국과 중국 두 곳뿐이에요. 그런데 이런 성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한테는요? 코로나 확산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덕분에 돈 번 기업이 있으면 세금 들어오잖아요. 그렇다면 지금 걷히는 세금은 코로나 방역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하는 것 아닌가요?” 쉬지 않고 말을 잇는다. “일본은 가게 크기에 따라 임대료를 보상해줬다고 하고 미국은 전 국민에게 2천달러(약 220만원)씩 또 준대요. 유럽도 천문학적인 재정을 써요. 한국 경제 수준이 그들만 못한가요? 아니잖아요. 한국 정부는 지금 어디 있나요?”

배상 없는 영업정지에 상인들의 불만은 크지만, ‘합리성’과 ‘공정함’을 요청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당장 다급한 생계 앞에서도 서구 사회처럼 자유를 제한하는 방역 지침에 무조건적인 ‘시민 불복종’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헬스장이나 광주 지역 유흥업소에서 ‘불복종 운동’을 경고했어도 실제 행동으로 넓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직은, ‘코로나19 방역이 가장 중요하다’는 대전제를 흔들지 않는다.

대신 실효성을 고민한다. “밤 9시 영업제한을 하잖아요. 이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요. 9시에 사람들이 몰려나오는 걸 보면서 이게 더 위험하겠다고 생각했어요.”(이태원 폐업 식당 업주 배상국씨) 형평성을 묻는다. “와플이 주메뉴인데 왜 우리는 등록업종이 카페라는 이유로 다른 브런치 카페처럼 영업을 못할까. 사람이다보니 문 연 가게를 보면 속상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심혁 사장) 정교해지길 바란다. “위험한 상황이니 예민해야 하지만, 1년을 지냈는데도 초기 방역 방식이 업그레이드되지 못한 것 같아요.”(DJ코난)

‘자프란마트’에서 시디크 아부바커 사장이 물품을 정리하고 있다.

‘자프란마트’에서 시디크 아부바커 사장이 물품을 정리하고 있다.

#3. 미래는 반복돼선 안 된다

“한국 사람들은 무조건 헐어버리잖아.”

-강유가람 감독, 다큐멘터리 <이태원>

코로나19를 버티지 못하고 배상국씨는 이태원 소방서 옆에서 운영하던 그릴 레스토랑을 2020년 8월 폐업했다. 12년 만에 이태원을 떠났다. 이제 서울 마포구 연남동 한 가게에서 매니저 일을 하고 있다. 이태원에서 “밥집만 3개 내는 인생 목표”를 세웠다. 짧지 않은 시간,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해 이태원에서 몇 개의 가게를 내고 접었는데, 완전히 이태원을 떠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저는 주말 없이 일만 했으니까, 그냥 이태원의 황량한 분위기만 알고 있었죠. 그런데 이태원을 나와서 서울 다른 곳을 돌아다녀보니 사람이 꽤 있는 거예요. 아, 이태원이 정말 힘들긴 힘들었구나. 그게 또 울컥해서 괜히 눈물 날 것 같았어요.”

코로나19발 둥지 내몰림, 이태원의 획일화

떠나온 처지인데도 코로나19 이후 이태원을 생각한다. “경리단길 같은 일이 비슷하게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돼요.” 그는 이태원과 맞붙은 경리단길 상권에서 2017~2018년 가게를 운영한 적이 있다. 경리단길 임대료가 최고치에 이른 시점이다. 상권이 뜨기 시작한 2010년대 초반에 견줘, 많게는 3배 가까운 임대료 상승이 있었다. 높은 비용을 못 견디고 자기만의 멋을 품고 있던 경리단길 가게들이 떠났다.

“그래도 경리단길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거리는 “상상 이상으로 너무 추웠다”. 사람 없는 거리에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 이태원으로 돌아왔다. 빚 1억원만 남았다. “큰 빚을 지고 나면 다시 장사해서 갚는 수밖에 없어요.” 그의 성실함을 알아준 주변에 도움을 구해 이태원에서 레스토랑을 다시 시작했다. 다행히 장사가 잘됐다. 1년 만에 5천만원까지 빚을 줄이긴 했는데, 코로나19를 맞았다. 빚을 완전히 털어내지는 못했다.

비어가는 이태원 거리를 보며 경리단길을 생각했다. 당시 경리단길은 임대료 상승 자체가 문제였다. 지금 이태원은 임대료를 낼 능력이 문제다. 코로나19 이후 이태원의 평균 임대료는 다소 내려가는 추세다. 물론 건물주에 따라 다르다. 용산 미군기지 공원화 같은 지역 호재를 안고 오르는 건물 가치를 생각하면, 건물주 입장에서 당장 임대료를 내려 가게를 지키기보다 공실로 비워둔 채 버틸 유인도 있다. 자영업자가 받을 권리금만 없앤 채 가게를 내놓을 수도 있다.

“경리단은 그때 가게들이 나온 자리가 그냥 방치된 경우가 많았어요. 이태원은 빈 가게가 채워질지도 모르죠. 다만 힘든 시기이니 어느 정도 자본이 있는 사람만 들어올 수 있을 것이고, 자기 기술이나 특색을 가졌지만 자본은 부족한 재밌는 사람이 들어올 여지는 적을 것 같아요. 그럼 상권은 객단가가 높은 술집이나 큰 자본을 가진 대기업 중심으로 꾸려지지 않을까요.” 일종의 코로나19발 둥지 내몰림, 이태원의 획일화를 걱정한다.

물론 전혀 다른 각도로, 지금 이 상황에서 희망을 찾는 이도 있다. 이태원의 한 이탈리아 식당 운영자는 “목 좋은 곳에 빈 가게가 많고, 가게에 따라 임대료와 권리금이 내려간 지금이 다시 이태원에 새롭고 젊은 사람들이 들어올 기회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려든 희망이든. 결국 이태원의 특별함을 만들었던 이들, 이를테면 “높은 문화자본과 상대적으로 적은 경제자본을 가진”(강유가람 등, ‘청년 예술가 창업가들의 골목길 고군분투기’) 창조적인 이들이 코로나19로 흔들린 이태원을 다시 살릴 것이라는 생각만은 비슷하다. “건물 모양이 아니라 사람이 인테리어인 동네니까요. 다양한 사람들이 장사하고, 걷고, 앉아 있는 모습 자체가 자산인 곳이요.”(배상국씨)

이 동네 장사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

1월12일 이태원 소방서 뒤편 언덕, 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 앞에도 눈이 쌓인다. 방글라데시 출신 시디크 아부바커는 성원 앞 골목에서 주로 모슬렘 여행객을 상대로 여행사와 식당, 마트, 환전소 등을 운영한다. “눈 치우는 거 있어요?” 이웃 한국 상인이 가게 문을 열고 묻는다. “하나 있어요.” 빌려준다.

여행객, 사원을 찾던 모슬렘들이 사라지면서 그 역시 90% 가까운 매출 손실을 보았다. 임대료는 대책 없이 밀리고 있다. “너무 힘들게, 힘들게 버티는데 이 동네에서 장사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단호한 표정이다. “너무 좋은 동네잖아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섞여 있다는 것 자체가.” 단절의 시간, 혐오의 말들 앞에 이태원 거리와 가게를 지키는 일이 지닌 의미를 그 역시 생각한다. 당장은 이태원 자영업자의 일, 조금만 내다봐도 공동체 전체의 일이다. 창밖에 쌓여가는 눈만이 길의 경계를 지우고 있다.

글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표지이야기 - 코로나19 낙인 이후 이태원 르포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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