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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폭설의 폭로

등록 2021-01-17 11:25 수정 2021-01-21 01:1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1월6일 저녁, 라이더들의 단체대화방에는 눈 덮인 도시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이 와중에 한 라이더가 넘어져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어떡하냐고 물었다. ‘어떡하긴! 바로 병원으로 가야죠.’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자기 몸보다는 병원비, 배달통에 있는 음식, 눈 속에 방치될 오토바이가 걱정될 것이다. 배달이 불가능해 보여 배민에 온라인 문의를 했지만, 20분 동안 답이 없어 할 수 없이 들고 있던 음식을 배달하다 사고가 난 것이다.

배민뿐만 아니라 쿠팡이츠에서도 상담이 불가능했다. 음식 픽업을 위해 눈을 뚫고 가게에 도착했더니, 가게 주인이 문 닫고 가버린 경우도 있었다. 폭설이 내리는 상황에서 라이더에게 제대로 된 공지는 없었다.

정보를 쥔 플랫폼이 역할을 하지 않으면 사고가 난다. 한 쿠팡이츠 라이더는 무책임한 플랫폼을 대신했다. 폭설이 내리자 먼저 손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짜 죄송한데,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오래 걸릴 것 같아요.” 눈보라를 뚫고 드디어 손님이 사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거울 속 눈사람이 된 자신을 발견하고 그 모습을 사진 찍었다. 거울에는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라는 아름다운 문구가 적혀 있었다.

혼자 미끄러져도 산재 됩니다

눈 내린 다음날, 거리는 빙판길로 바뀐다. 하루이틀 정도야 쉴 수 있지만 위험하다고 일을 안 했다가는 생계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한 배민 라이더가 빙판에 미끄러져 주차된 차를 박았다. 다행히 비싼 배달용 보험(유상운송보험)에 가입해 보험처리를 할 수 있었지만, 사고를 낸 라이더는 보험사가 아니라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보험처리를 하면, 이미 300여만원인 보험료가 더 오른다는 것이다.

사고처리를 반복하면 아예 보험 가입 자체가 막히기도 한다. 보험을 들지 않고 일하면 너무 위험하니, 차라리 현금처리를 하는 게 낫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빙판 위에서 일한 대가는 3만원. 그가 지인에게 돈을 빌려 보상한 금액은 약 100만원이었다. 쿠팡이츠는 라이더가 배달용 보험에 들었는지 확인하지 않기 때문에, 미끄러져 비싼 외제차나 사람을 쳤다면 오롯이 자기 돈으로 갚아야 한다. 그래서 하루 일당으로 수십만원을 벌어도 불안하다.

주말에 일을 나갔다가 동네 배달대행 업체에서 관리자로 일하는 라이더와 얘기를 나눴는데, 무려 9명이 입원했다고 한다. 산업재해 처리하라고 했더니,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아서 안 된다고 했다. 보험에 가입하지 않아도 가능하다고 했더니, 혼자 넘어져서 안 된다고 했다. 산재는 혼자 미끄러져도 되니 꼭 산재 신청을 안내하라고 했다.

동네 배달대행 업체에서 일하는 라이더들은 산재가 되는지도 모른 채 일하다가 다쳐서 모아놓은 돈을 병원비로 날린다. 도시를 하얗게 덮어버린 폭설은 거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신분과 처지를 순백하게 드러냈다. 불쌍하니 도와달라는 얘기가 아니다. 라이더들이 신호 위반을 하고 불법을 저지르면 처벌받아야 한다. 폭설과 태풍이 오면 일을 쉬고, 보험은 보장하고, 배달하다 사고 나면 기업이 함께 책임지자는 상식적인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욕먹어도 침묵하지 말자

빙판길이 두려워 시속 40㎞로 천천히 달리는데, 뒤에 있던 자동차가 차선 변경 없이 아슬아슬하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화가 나서 빵빵거렸지만 비웃듯 차는 그냥 지나갔다. 두 번째 차가 같은 방식으로 지나갔다. 세 번째 차가 같은 방식으로 지나갔다. 처음에는 빵빵거리며 화냈지만, 반복되니 지쳐서 침묵했다. 카톡으로 사진이 하나 왔다. 뒤에서 추월하는 차에 치여 넘어진 조합원이 구급차에 실려 가는 모습이었다. 가해자는 왜 천천히 가냐고 화냈다고 한다. 아무리 욕먹어도 침묵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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