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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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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크루즈에서 사람들을 구출하자

‘권리를 가질 권리’를 차단당한 격리 시설 생활자들…
감염병 상황에서 드러난 잔인한 공리주의
등록 2021-01-17 10:13 수정 2021-01-21 01:17
2020년 3월 초 코호트로 격리된 대구의 아파트에 국군화생방방호사령부 장병들이 방역을 위해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2020년 3월 초 코호트로 격리된 대구의 아파트에 국군화생방방호사령부 장병들이 방역을 위해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몸무게 42㎏, 폐쇄병동 생활 20년.’
2020년 2월 국내에서 코로나19로 처음 사망한 ㄱ씨(당시 63살)를 설명하는 말이다. 코로나19 첫 사망자가 정신병동(경북 청도대남병원)에서 나온 것은 상징적이다. 환기가 안 되는 ‘폐쇄성’, 여러 명이 한 병실에서 생활하는 ‘과밀함’, 침상이 없는 ‘비위생’, ㄱ씨가 사망 직전까지 머물렀던 공간은 감염병 시대의 대책과 모든 면에서 어긋났다. 이 모든 상황이 맞물린 청도대남병원에선 정신질환자 104명 중 102명이 확진됐다.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밀집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집단감염되는 출발점이다.
2020년 11월 중순 시작된 코로나19 3차 대유행은 1·2차 때와 달리 감염병이 누구를 목표 대상으로 삼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교정시설, 장애인시설, 정신병원 등 한국 사회에서 인권을 주장하기 어려운 격리시설에 거주하는 수용인이다. 본래 교정과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감염병을 통해 배제와 격리, 고립, 방치라는 격리시설의 본질이 어김없이 드러났다. 인권활동가들은 “한국 사회에 잠복한, 불평등과 차별이라는 문제를 바이러스가 드러내 보여줄 뿐”이라고 말한다.
청도대남병원 이후 밀집·밀접·밀폐를 일컫는 ‘3밀 공간’의 집단감염이 계속 발생했지만, 정부는 ‘코호트(동일집단) 격리’라는 원천 봉쇄 말고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코호트 격리를 한 곳 가운데 이른바 n차 감염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다. 서울동부구치소에서 1193명(2021년 1월14일 기준), 장애인거주시설에서 247명(1월12일 기준)이 확진되고, 전체 사망자 1027명 중 정신질환자가 408명(1월6일 기준)에 이른다. 코호트 격리를 21세기 한국 정부가 집단감염 사태에서 취한 조처 가운데 최악이라 하는 이유다.
지금이라도 죽음을 복기해야 한다. 기억하지 않은 잘못은 반복의 형태로 복수를 감행하는 까닭이다. ‘코로나19 시대 격리시설 보고서’를 시작한다._편집자주

코로나19 확산이 가장 우려하던 곳에서 터지고 있다. 사람들이 집단 거주하는 시설이다. 장애인집단거주시설, 요양원, 구치소 등이 그렇다. 한번 터지면 그 규모와 여파가 엄청나다. 더구나 대책은 코호트 격리인데, 격리 뒤 체계적인 대책이 없다보니 코로나19 확산 초창기 일본 크루즈 선박처럼 돼간다. 감염된 뒤에야 비로소 하선할 수 있었던 곳 말이다. 그래서 격리를 통한 보호가 아닌, 방치이고 유기라는 말이 나온다.

만남은 꿈의 원천

그러나 ‘코호트 격리’는 감염 확산 이후에 시작된 게 아니다. 코로나19가 대유행하기 전에도 이미 시설 자체가 ‘코호트 격리’하는 곳이었다.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의 ‘안전’을 이유로 외부와 차단했다. 지금 집단감염으로 문제가 되는 신아원 같은 장애인거주시설의 경우에도 코로나19로 모든 만남이 단절됐다. 그 시설에서 장애인들이 나와 사회적 삶을 돌려받는 일을 지원하던 장애인권단체 ‘장애여성공감’(이하 공감)에 따르면, 코로나19와 더불어 그들이 시설 안 장애인들과 함께 가장 많이 한 말이 “우린 언제 다시 만날까요?”였다고 한다.

물론 보호를 명목으로 갇힌 대상은 외부와의 만남이 절실했던 장애인 당사자였다. 사람이 차단된 것과 함께 정보도 차단됐다. 공감 대표 이진희씨는 이것이 장애인권단체에서 탈시설을 주장한 가장 큰 이유였다고 말한다. 시설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지역사회에서 유리되는 동시에 사회적 자원과 관계로부터 배제된다. 따라서 장애인 당사자는 자신이 무엇을 주장할 수 있고 어디에서 도움받거나 함께할 수 있는지, 바로 그 권리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린다면, 만남을 통해 다른 삶의 가능성을 아는 것이 ‘권리를 가질 권리’의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를 알아야 그것을 요구하며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다. 사람은 ‘꿈의 존재’다. 꿈을 위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만남이다. 꿈꾸는 존재로서 사람에게 바깥 세계와 접촉하고 다른 존재와 만나는 일은 ‘권리를 가질 권리’의 가장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장애인활동가들은 시설이 꿈을 차단하는 곳이라고 비판한다. 꿈의 원천이 되는 만남은 제한적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장애인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통제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다. 사람을 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삶의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현재 삶에 순응하게 된다. 이 삶이 가장 안전하고 주어진 최선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삶을 ‘보장’하는 권력에 복종하고 순응한다.

지금 요양병원에서 장애인집단거주시설까지 밝혀진 것은 이 장소들이 막상 감염이 발생하자마자 사람에게서 꿈을 박탈하면서까지 약속한 안전을 전혀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정작 내부에서 감염이 발생하자 ‘안전한 공간’이라고 말했지만 시설은 가장 위험한 공간이 돼버렸다. 안전을 약속했지만 아무런 안전 대비가 돼 있지 않고 대책도 없다는 게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여기 계속 있어야 하는가? 사회를 보호하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다. 처음 격리는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졌지만, 실제 감염이 발생하면 사회를 이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특히 집단감염이 효용가치가 낮은 사회의 ‘변두리’에서 발생하면 이들을 돌보는 것에 국가는 현격히 무관심하거나 소홀해진다. 사회 전체의 이익과 큰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격리하고 차단하면 그뿐이다. 여기 들어갈 비용으로 효용가치가 높은 사회의 중심을 보호하는 게 더 다수의 행복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2021년 1월 초 광주의 요양병원에서 장기간 입원했던 코로나19 비확진 환자들이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2021년 1월 초 광주의 요양병원에서 장기간 입원했던 코로나19 비확진 환자들이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구치소 확진자보다 추 법무장관에게 관심

비슷한 때 3차 대유행이 일어난 뒤, 집단으로 이어지던 노인집단거주시설인 요양원에서도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코호트 격리 중이던 경기도 부천의 요양병원에선 누적 사망자 수가 수십 명에 이르렀는데도, 확진자들은 격리된 채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서울 구로의 한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진은 자신의 병원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아무런 인력 지원 없이 모두 다 감염돼 죽을 때까지 갇혀 있을 수밖에 없냐며, 이 상황은 마치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초창기 일본 크루즈선에서 일어났던 사태와 비슷하다고 절규했다.

또 하나의 집단거주시설에서 대규모 감염이 일어난 곳이 구치소다. 서울동부구치소에서 일어난 집단감염은 단일 시설로는 1천여 명의 확진자가 나온 최대 사건이었다. 구치소에서 최초의 감염은 2020년 11월27일 시작됐지만, 한 달이 지나는 동안 구치소와 법무부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미흡하게 대처하다 최대 감염 시설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문제는 격리된 내부에서 확진자와 비확진자,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의료진을 보호하는 대책과 장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격리된 내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감금한 상태에서 방치한다. 그러다보니 구로요양병원 의료진이 청와대 청원에서 밝힌 것처럼, 검사할 때마다 확진자가 속출하고 같이 있는 의료진은 제대로 지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번아웃(탈진)되며 같이 감염되는 비극이 모든 시설에서 반복된다.

비극은 반복되며 점점 더 규모가 커지는데, 정부의 대응과 사회적 관심은 더디기만 하다. 구치소의 경우에도 한참이나 지나 단일 시설 최대 감염이 되고 나서야 보도가 쏟아졌다. 그것도 확진자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보다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의 정치적 맥락과 관련해 집중 보도했다. 구치소 안 감염된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정치적 쟁점’이 없는 장애인집단거주시설에 대한 무관심은 더 심하다. 장애인활동가들이 집단감염에 대해 서울시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농성에 들어간 것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

왜 그럴까? 감염병 같은 재난은 숨겨졌던 사회의 통치 원리인 공리주의를 노골화한다. 통치 권력 처지에선 비용을 아끼는 것이 최선이다. 주변부 통치는 저비용, 저임금, 사회적 삶의 부정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돌봄에 대한 ‘사적 책임’을 특징으로 한다. 최대한 ‘공적’인 돈을 아끼기 위해 과밀한 상태에서 저임금의 최소 인원으로 최대 인원을 돌보고 그 비용을 가족에게 떠넘긴다. 이 때문에 코호트 격리 이전에도 크고 작은 안전사고와 방치 등 사고가 주변부에서 끊이지 않았다.

사실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모든 통치는 공리주의에 기반을 둔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말은, 잘 아는 것처럼 그 이면에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는 소수의 불행과 배제는 불가피하다는 잔인함을 바탕으로 둔다. 공리주의가 노골화하면 사람들은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수’에 들어가려 하고 ‘소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소수의 희생을 외면한다. 그 희생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정당화한다. ‘사회적 가치’에 따라 사람 목숨은 서열화된다.

바로 이 점에서 공리주의는 통치의 원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재난적 상황에선 통치가 방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되기도 한다. 통치가 주변부를 공리주의적으로 방관할수록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주변부 사람들의 안전은 뒷순위로 밀리거나 희생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정당화하는 마음이 대중 일반 정서가 된다. 재난 상황에서 한정된 자원은 동료 시민들의 관계를 제로섬게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 마음을 지배하는 건 모두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희생시킬지 고민하는 잔인함이다.

공리주의적 통치와 대중의 공리주의적 마음 사이에서 그 잔인함을 수행해야 하는 윤리적 선택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 지금 같은 감염병 상황에서는 의료진과 돌봄노동자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의료시스템이 붕괴한 뒤에 벌어진 일이 대표적이다. 공리주의의 큰 잔인함은 그 선택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윤리 문제로 떠맡겨버린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의사들이 그렇게 했듯이. 하나 남은 산소호흡기를 먼저 들어온 80대 노인에게 씌울 것인가, 아니면 갑자기 악화돼 들어온 30대를 위해 남겨놓을 것인가. 지금 이탈리아에서는 103살 노인이 백신을 맞은 것을 두고 “다 늙어서 무슨 소용이냐?”는 비난이 거세다.

이처럼 공리주의가 노골화하면 통치 권력은 책임을 떠넘기며 무책임해지고, 대중은 외면하며 잔인해지고, 윤리적 결단은 그 장소에서 그 일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과 주변부 사람들의 가족 것이 된다. 그 결단에 아무도 같이 책임을 나누지 않는다. 오로지 결단을 수행하거나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 몫이 되고, 그들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과 죄책감에 괴로워하게 된다. 그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을 응원한다지만, 그들 역시 집단 격리된 사람들과 함께 ‘감금’돼 있는 것이다. 몸이 아니라 반윤리적인 상황에.

공리주의의 순간을 피하기 위해

그래서 통치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공리주의의 순간을 회피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격리돼 윤리적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을 의료진과 돌봄노동자를 전폭 지원해야 한다. 또한 장애인권단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무대책의 코호트 격리를 해제하고 이들을 안전하게 분산 수용해야 한다. 저 크루즈에서 사람들을 구출해야 할 때다. 수용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 그들을 시설에 위탁할 수밖에 없던 가족들까지.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공리주의적 잔인함으로부터.

엄기호 사회학자

*표지이야기 - 코로나19 격리시설 보고서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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