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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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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손절’하는 중입니다

[관계 버리기] 죄책감 느낄 필요 없는 경계 그어 나를 지키기
등록 2020-12-30 13:01 수정 2020-12-31 01:46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버려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tvN 인기 프로그램 <신박한 정리>가 주려는 교훈이다. 집에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비우면서 내 욕망도 비울 수 있다니, 당장 정리를 시작하고 싶다.
그런데 욕망을 버리려고 물건까지 버려야 할까. 2021년 진짜 신박한 정리를 제안한다. ‘마인드 미니멀리즘’이다. 나를 파괴하는 욕망, 욕구, 습관, 집착 따위는 2020년에 묻어두자. 기자들도 소소한 실천을 해봤다. 육식, 플라스틱 빨대, 하루 한 잔의 술, 게임 현질(아이템을 돈 주고 사는 것), 배달음식을 버렸다. 정말로 버리니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버리는 것은 끝없는 투쟁이라는 사실. _편집자주

‘손절’.

손절매의 약자. 주가 하락을 예상해 손해를 감수하고 소유한 주식을 매입한 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파는 일이다. 숫자로만 오가는 가상 영역에서 사용하는 이 경제용어가 감정 영역인 인간관계에도 한 발을 쑥 내밀었다. 나에게 이롭지 않은 관계에 에너지를 쓰지 않고 관계를 끊는 것, 인간관계에서 손절의 쓰임이다. 손익과 감정,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는 곧잘 인터넷 커뮤니티에 고민글로도 오른다. “내 결혼식에 연락 없이 오지 않은 친구와 손절할까요?” “당신을 은행으로만 아는 가족과는 절연하세요” “굳이 왜 그런 사람과 인연을 이어갑니까?”라고

절연, 손절 같은 무언가와 끊어내고 베어내는 일은 일면 부정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 ‘겸손해라’ ‘부모를 공경하라’며 ‘바른 생활’ 교육을 받은 이들에겐 ‘관계 손절’은 어렵기만 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미덕으로 취급되고 인맥이 능력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선 더욱 그렇다.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의 저자이기도 한 성유미 전문의(정신건강의학)는 ‘손절’을 “건강한 시도”라고 본다. 손해를 그대로 두는 건 ‘자기파괴적 행동’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성유미 전문의는 “손절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스스로 분명히 인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 단계”라고 말했다.

여기 더 이상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새해 다짐한 사람들이 있다. “힘들어서” “함께하면 내가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져서” 저마다 다른 이유로 ‘관계 다이어트’에 나섰지만, 목표는 같다. 관계에 경계를 두어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에게 더 집중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지만 상대를 더욱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안심해도 좋다. 당신은 이 관계를 깨뜨린 죄인이 아니다.”(양지아링,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은 버리기로 했다>
#1.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

김미지(32·가명)씨는 엄마와 조금씩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하고 있다. 미지씨는 ‘엄마에겐 나뿐이야’라는 생각으로 30여 년을 살았다. 아버지의 외도로 외로웠던 엄마가 기댈 곳은 미지씨뿐이었다. 미지씨가 ‘중2병’ 없이 사춘기를 난 것도,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한 것도, 그래서 이른바 ‘명문대’에 들어간 것도 모두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

불완전한 남편을 둔 엄마에게 완전한 딸이 되고 싶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엄마가 아버지와 이혼한 뒤, 미지씨는 엄마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길 자처했다. 휴가를 내어 엄마와 여행을 다녔고, 주말엔 함께 영화도 봤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하면서 엄마와 거의 한 몸처럼 지내고 있다.

조금씩 엄마가 버거워진 것은 오랫동안 연애 중인 애인과 결혼을 고민하면서다. 결혼하는 건 엄마를 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든 미지씨는 2020년 6월 상담받기 시작했다. “당신은 엄마가 아니라 딸이다.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상담사 조언을 들은 뒤, 미지씨는 천천히 엄마와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2021년엔 엄마와 ‘따로 갖는’ 시간을 늘릴 예정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2. 나에게 넌 10만원, 너에게 난 0원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병일(37·가명)씨는 이 말을 믿었다. 학교, 직장 혹은 동호회 등에서 맺은 인연을 소중히 생각했다. 친구가 결혼 소식을 알리며 10년 만에 연락해도 병일씨는 ‘좋은 일에 불러줘서 고맙다’고 생각했다. 은행에 취업한 대학 선배가 몇 년 만에 전화해 신용카드 발급을 부탁할 때도 ‘오죽하면 나한테’라고 여기며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이는 병일씨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성격 때문에 병일씨는 종종 상처받는다. 고등학교 친구의 결혼식에 국외 출장으로 참석하지 못해 축의금 10만원을 보냈지만, 친구는 석 달 뒤 있었던 병일씨 아버지의 장례식에 별다른 연락 없이 오지 않았다. 자신이 상대를 대하는 것만큼, 상대가 나를 친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생각에 병일씨는 자신이 맺은 관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인생은 좋은 사람을 붙잡지 못하는 것보다 보내야 할 사람을 ‘제때’ 보내지 못할 때 더 크게 훼손되는 법이다.”(성유미,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관계에는 상대가 있다. “경험으로서의 세계는 근원어 ‘나-그것’에 속한다. 근원어 ‘나-너’는 관계의 세계를 세운다.”(마르틴 부버, <나와 너>) 마르틴 부버는 도구로서 존재하는 ‘그것’과의 관계는,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너’와의 관계와 다르다고 했다. ‘나와 그것’에서 ‘나’는 ‘그것’을 이용하는 주체지만, ‘나와 너’에서 ‘나’는 인격이 된다. 그러나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그것’이 되든, ‘너’가 되든 사람은 사람을 겪으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정신의학과 의사는 “내원하는 환자의 상당수가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2015~2019년 극단적 선택을 한 566명을 심리부검한 결과를 보더라도, 정신건강과 ‘관계’는 중요한 열쇳말이다. 이들의 스트레스 요인(복수 응답)으로 ‘정신건강 문제’(503명)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가족 관련’(358명)이 뒤따랐다. 그 밖에 ‘관계’와 관련된 스트레스는 ‘부부관계’(224명), ‘가족 외 대인 관계’(149명), ‘연애’(69명)가 있다.(중앙심리부검센터, ‘2020 심리부검면담 결과보고서’)

하지만 살아가면서 스트레스를 주는 모든 사람을 정리할 수는 없다. 이에 “타격이 적은 관계부터 정리하라”부터 “서서히 연락을 끊으라”까지 관계에 관한 책들은 정리하는 방법을 내놓는다. 방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으로 언급하는 말이 있다. ‘나’. 개별적 존재인 나를 중심에 놓고 내가 정한 경계 안에 남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유미 전문의는 “내 중심에 ‘나 자신’이 있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중심이 되란 뜻이 아니라 내 내면에 자아라는 무게추를 항상 둔 상태로 관계를 만들어가라”고 조언했다.

“모든 인간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고 적응하는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다. 그 사실을 믿으면 함께 울며 고통을 나누면서도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갈 힘과 근원이 된다.”(정혜신, <당신이 옳다>)

코로나19로 ‘만남’을 못하면서 몇몇 사람과의 관계는 힘들이지 않고도 정리된다. 휴대전화에 번호가 저장된 사람들의 목록을 찬찬히 살펴본다. 그냥 (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 그냥 (동호회에서 만난) 아는 동생, 그냥 (같이 일한) 동료…. ‘그냥’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관계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 건 아니었는지 돌이켜본다.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돼’(김재식, 위즈덤하우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어’(김유은, 좋은북스), ‘나를 잃어가면서 지켜야 할 관계는 없다’(이지영, 스몰빅라이프)라고 되새기며 해로운 관계는 정리하고, 새해엔 건강한 관계만 남기기를.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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