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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영수증] 손빨래 안 해도 되는 집을 구했다

1년 반 동안 살았던 마을을 떠나 새집에서 보낼 2021년
등록 2020-12-26 15:05 수정 2020-12-27 02:42
손재주 좋은 친구들이 폐자재와 종이를 이용해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다.

손재주 좋은 친구들이 폐자재와 종이를 이용해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다.

어느덧 연말이다. 동네 친구들과 얼마 전 크리스마스 파티를 조촐하게 열었다. 이름은 크리스마스 파티였지만, 실은 마을을 떠나는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우리 마을 한중간에 있는 오래된 폐교는 2019년 여름부터 시골에서 살아보고 싶은 청년들을 위한 체류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2020년 여름 둘째 기수가 새로 들어왔다. 파티가 끝난 다음날, 약 5개월간 마을에서 생활한 친구들이 하나둘 짐을 꾸려 다시 제집이 있는 도시로 돌아갔다. 폐교는 다시 텅 비었다. 첫째 기수 중 마을에 남은 사람은 우리 부부 둘뿐이었는데, 둘째 기수에서는 마을에 남겠다고 한 사람이 없었다.

친구들이 모두 떠나기 전, 이장님을 비롯한 사무장님, 부녀회장님, 어촌계장님 등 마을을 이끄는 지도자분들을 모시고 간담회를 열었다. 그동안 청년들이 마을에 살면서 좋았던 점, 어려웠던 점, 마을에 바라는 점 등을 각자 발표했다. 대부분 비슷한 의견이었다. 풍광 좋은 시골 마을에서 인심 좋은 어르신들 덕분에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계속 살 집을 구하기 어렵고, 별다른 일거리도 없으며, 여러 생활적인 불편함과 문화차이도 커서 마을에 남기보다는 다시 도시로 돌아가 앞으로 살길을 궁리해보겠다고 말이다. 당장 해결할 수도 우리 마을만 가진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니 서로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아쉬운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간담회는 끝났다.

폐교를 임시 거처 삼아 마을에서 1년 반을 지냈던 우리 부부 역시, 12월을 끝으로 정든 마을을 떠나게 됐다. 여러 사정이 있지만, 결국 가장 큰 이유는 집 문제다. 아름다운 마을이고 가까워진 이웃이 있어 최대한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마땅히 살 집을 구하기 어려웠다. 민박으로 가끔 쓰던 오래된 집에서 1년 동안 월세를 내고 살게 해주겠다는 분도 계셨지만, 집 상태가 영 좋지 않아 고사했다. 주인을 설득할 테니 건너편 폐가라도 생각해보라는 제안도 있었지만, 집을 허물고 다시 지을 만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도 않다. 어찌 됐든 마을을 떠나지 않고 남을 방도를 찾을 수야 있겠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는 집에서 1년이든 2년이든 버티면서 임시방편의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결국 마을 안에서 집을 구하는 것은 포기하고, 집을 찾아 남해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다행히 마음에 드는 집을 구했다. 이제는 세면대가 있는 화장실을 쓸 수 있으며, 세탁기가 들어가지 않아 손빨래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며, 더는 북향이 아니니 집 안이 환할 것이다.

새로운 집에서의 생활은 기대되지만, 그래도 마을 어르신들이 집은 구했냐고 물으실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얼마 전 가깝게 지내는 앞집 할아버지께서 집은 구하고 있냐고 다시 물으셨다. 계속 걱정하실 것 같아 조심스레 새로 이사 갈 집을 구했으니 이제 염려하시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너희가 잘됐으면 좋겠다.” 마을을 떠나게 되어 괜히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그 한마디가 참 감사했다.

이사를 앞두고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남기고 가면 좋을까 고민이다. “덕분에 잘 지내다 갑니다. 새로운 마을에 가서도 둘이 잘 살아보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이 정도면 적당한 인사가 될까.

남해=글·사진 권진영 생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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