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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성과 재생산 권리’가 입에 붙도록

사라지는 낙태죄, 의료 공백으로 남겨진 임신중지… 새해에는 ‘성과 재생산 권리’ 논의 진전될 수 있을까
등록 2020-12-25 10:50 수정 2020-12-27 02:03
대학생 연합 페미니즘 동아리 ‘모두의 페미니즘’이 2020년 11월15일 주최한 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안전한 임신중지권’을 적은 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대학생 연합 페미니즘 동아리 ‘모두의 페미니즘’이 2020년 11월15일 주최한 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안전한 임신중지권’을 적은 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2020년 12월31일이면 제정된 지 67년 만에 형법상 ‘낙태죄’ 조항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12월 임시국회가 진행 중이지만, 개선입법 시한을 불과 일주일여 남겨두고도 정부안과 의원 입법안 모두 소관 상임위원회 심사조차 거치지 못한 상태다. “이번 임시회에서 관련 법령을 논의할 계획이 없다”는 더불어민주당 관계자의 발언도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대안도 없이 사라지는 ‘낙태죄’

이를 진보적인 조처로만 보긴 어렵다.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어떤 준비도 없이 법 조항만 사라지기 때문이다. 현행 모자보건법은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 등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예외적인 경우를 명시했을 뿐 양질의 임신중지를 보장하는 제도적 기반에 관해선 아무런 규정이 없다. 그런데도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낙태죄 폐지와 관련해 내내 소극적이었다. 2019년 헌법재판소에는 “의견 없음”을 의견으로 제출했고,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준비하면서도 발표 직전까지 “결정된 내용이 없다”며 보안 유지에 급급했다. 해당 개정안엔 여성계가 반대해온 ‘상담 의무화’ 조항 등이 담겼다.

사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임신중지 관련 업무는 보건복지부의 ‘인구정책실 출산정책과’에서 담당한다. 생애주기에 따른 포괄적인 여성 건강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임신하고 출산하는 여성에게만 관심을 둔 부서다. 여성 건강 업무는 보건의료 분야로 기술적 전문성이 필요한데도 직접 건강 정책을 기획·집행할 권한이 없는 여성가족부가 떠맡는 일도 발생했다. 대통령 공약이던 ‘여성건강정책기본계획’은 어떤 이유에선지 복지부가 아닌 여가부가 주무 부처가 됐고, 실제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관련 연구용역까지 별도로 수행했지만 해당 계획은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안전한 임신중지는, ‘성과 재생산 건강 및 권리’(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and Rights·SRHR)를 보장하기 위한 기술이자 필수 의료서비스다. 성·재생산권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고, 더 나아가 생애주기에 이뤄지는 재생산(피임·임신·임신중지·출산·폐경 등) 과정에서 안전과 존엄, 건강을 보장받을 권리를 말한다. 예컨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성생활과 결혼, 임신과 출산을 하거나 하지 않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 △성적 지향과 정체성 표현을 결정할 권리 △이런 권리 행사에 필요한 정보·자원·서비스·지원에 대해 차별과 강제, 착취, 폭력 없이 접근을 보장받을 권리 등을 포함한다. 국제사회는 이를 ‘인권’으로 확립했다.

임신중지 ‘의료서비스 공백’ 영역으로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재생산권에 대한 논의는 임신중지에 대한 것만큼이나 빈약한 수준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성인지적 재생산 건강 증진 모델 개발 기초 연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7.1%만이 “성과 재생산 건강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전문가나 관료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15년 유엔총회에선 ‘재생산 권리와 건강에 대한 보편적 접근 보장 권리’를 2030년까지 달성해야 하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중 하나에 포함했다. 하지만 이 개념은 한국에 들어오면서 ‘출생 관련 건강 및 권리’로 쪼그라든다. 임신중지 권리를 떼어낸 채 출산 권리만 남긴 것이다.

2021년 낙태죄 조항이 사라진다면 규정상으로나마 ‘금기’로 남아 있던 임신중지가 ‘의료서비스 공백’ 영역으로 이동한다. 필수적이지만 그동안 한 번도 정책에 포괄되지 못했던 의료서비스를 새롭게 확립해야 할 의무가 정부에 부과되는 셈이다.

기본권이 온전히 보장된 임신중지가 가능하려면 어떤 필수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지, 성차별적 의료체계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구체적인 논의가 뒤따라야 한다. 2018년 수립된 ‘제2차 양성평등정책기본계획’에 명시된 것처럼 “성인지적 보건의료 정책기반 마련” “성인지적 건강 증진 인식 개선” 등 추상적이고 막연한 목표를 제시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

성·재생산권이 성별과 빈부에 무관하게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며, 노동환경 등 사회적 요소와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점도 인지해야 한다. 생식 독성이 있는 화학약품을 사용하는 노동자, 당직과 야근으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직장인, 인력 부족으로 임신할 순번을 정해놓고 피임을 강요받는 간호사 등은 수시로 성·재생산권을 침해당한다. 여성이 일상적인 성적 대상화와 성폭력으로 건강 위협을 받는다면, 남성은 부적절한 성교육과 폭력적인 남성성 규범 때문에 자유롭고 안전한 성관계를 추구할 자질 자체를 박탈당한다. 성소수자가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생식 건강에 대한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기 위해선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

일주일에 1천 명이 임신중지

임신중지는 오늘도 이뤄지고 있다.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2018년 발표한 정부 실태조사대로 연간 약 5만 건의 인공임신중절이 발생한다면 매일 137명, 일주일 동안 약 1천 명의 여성이 임신중지를 한다는 통계가 나온다. 비교적 흔히 접하는 맹장염 수술이 연간 8만 건 정도이고, 임신중지가 가임기 여성만 받는 시술임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흔한 의료 이용 경험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후속 정책이 늦어질수록 성·재생산권을 침해받는 이도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성과 재생산 건강 및 권리.” 새해를 시작하며 익숙지 않은 이 단어를 한 번씩 소리 내어 읽어보길 권한다. 더 많은 시민이 이 권리를 인지해 자유롭고 안전한 성생활을 누리고,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방식으로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을 권리를 누릴 수 있길 바란다. 또 ‘성·재생산권’이 곧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갈 권리’임을 이미 깨닫기 시작한 시민들의 요청에 정부가 응답하기를 기대한다.

김새롬 시민건강연구소 젠더와건강연구센터장

*참고 문헌
하정옥, ‘재생산권 개념의 역사화·정치화를 위한 시론’, <보건과 사회과학> 제34집,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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