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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은 좋은 시험이어야 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대입시험을 치른 한국… 찬란한 청소년기를 다 바칠 만큼 가치 있는 시험이어야
등록 2020-12-14 09:07 수정 2020-12-17 01:44
2020년 12월3일 부산의 한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아크릴 칸막이를 한 책상에서 마스크를 쓴 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20년 12월3일 부산의 한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아크릴 칸막이를 한 책상에서 마스크를 쓴 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팬데믹에도 멈추지 않은 인생을 건 시험’() ‘바이러스가 재확산됨에도 한국은 대입시험을 친다’(<워싱턴포스트>) ‘대입시험을 9시간 동안 본다. 코로나19가 그 시험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뉴욕타임스>) ‘한국인들은 코로나19 확산에도 앉아서 대입시험을 친다’(<알자지라>) 2020년 12월3일, 주요 외신은 이런 제목 아래 한국의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 대해 제법 긴 기사를 내보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대단한 일이긴 했다.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황에서 학생 49만 명이 한날한시에 실내에서 시험을 봤다. 거의 ‘모든’ 학생에게 시험 볼 기회를 주었다. 열이 나거나 기침하는 학생은 물론, 자가격리 중인 학생 400여 명도, 심지어 확진자 40여 명도 의료진을 대기시킨 채 시험을 봤다. 방역을 위해 책상 49만 개에 아크릴 칸막이를 설치했다. 플라스틱 쓰레기 대량 배출을 우려한 반대가 있었지만, 재활용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다. 이날을 위해 교육계와 방역 당국은 몇 달 동안 전쟁을 치렀다. 시험은 별 탈 없이 끝났다. 외국에서 보면 이는 놀라움을 넘어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해야 했다. 우리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다.

영국은 올해 대입시험을 포함해 모든 국가자격고사를 취소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수험생들은 결국 학교 선생님의 평가로 최종 성적을 받았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는 2021년에도 국가시험을 보지 않고 교사의 평가로 대체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 질문한 적이 있는데(제1306호 ‘담당교사가 수능 점수를 매긴다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그렇게 하면 우리 사회는 공정성 시비의 회오리 속에 빨려 들어가지 않을까.

2020년에는 많은 나라에서 대입(혹은 고교 졸업) 국가시험을 조정했다. 연기하거나(한국·중국·러시아·미국·독일 등), 취소하거나(영국·프랑스·그리스·네덜란드·노르웨이 등), 축소해서(오스트리아·덴마크·이스라엘·이탈리아 등) 시행했다.(UK NARIC Special Report, ‘The Effects of COVID-19 on International Secondary Assessment’, May 2020) 겨우 2주 연기한 한국은 변동 없이 치른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만약 우리도 유럽처럼 매일 수천, 수만 명씩 감염자가 생겼다면 어땠을까? 수능을 못 보면 플랜B는 무엇일까?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는 “교육에 집착하는 이 나라에서” 수능은 단지 대학 입학에 국한되지 않고 취업·승진·결혼 등 앞으로의 인생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도했다. 는 수능은 단 하루에, 6개 영역을 연이어 8시간 동안 본다며 이를 위해 아주 어릴 때부터 준비하고 실패하면 몇 년이나 재도전한다고 밝혔다. 다 아는 얘기인데 이렇게 들으니 수능일 그 하루의 무게와 시험 방식의 혹독함이 새삼스러웠다.

혹독한 통과의례

영국 학생에게 수능을 보라고 하면, 즉 하루 8시간 동안 거의 휴식 없이 7과목에 걸쳐 210개 문제를 풀라고 하면, 더욱이 한두 개만 더 틀려도 등급이 갈린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까?(영국에선 GCSE나 A레벨 같은 국가시험은 쉬엄쉬엄 거의 한 달 동안 본다.) 딸의 친구에게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 “맙소사, 엄청난 정신력과 집중력이 필요하고 스트레스도 대단할 텐데 그걸 사람이 어떻게 견디나요?”

한국 학생들은 다 견딘다. 물론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오랜 입시 준비로 몸과 마음을 단련해서, 초인적인 상태로 그 단 하루를 버틴다. ‘학력고사’를 본 나도 30여 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 이건 세대를 초월해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겪는 청소년기의 통과의례라고 할 만하다. 극도로 어려운 과업을 수행한 뒤 공동체의 독립된 구성원이 되는, 부족의 ‘성년식’이 연상된다.

수능일은 확실히 ‘의례’라고 할 만큼 특별하다. 수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겨루는 결전의 날, 수험생은 최고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 국가와 전 사회가 전폭적으로 나를 걱정하고 편의를 봐주는 날은 일생에서 이날밖에 없는 듯하다. 가는 곳에 늦지 않게 관공서와 기업의 출근 시간을 늦추고, 군부대 이동을 멈추고, 대중교통 운행을 늘리고, 경찰이 오토바이로 대기하는 호강을 언제 또 누릴까? 공정한 경쟁을 위해 항공기 운항을 중지하고 군사훈련도 멈추는 그런 평등한 세상을 언제 다시 경험하겠는가? 그뿐인가, 시험이 끝나면 수고했다고 가게마다 특별할인을 해준다. 이날은 수험생들이 밤거리를 점령해도(올해는 그것도 어려웠지만), 다들 관대하다. 그건 오랫동안 준비한 이 하루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게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모두 잘 알기 때문이다.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도 달려 있다

외신 보도처럼 수능은 대입을 넘어 직업, 결혼, 사회적 지위 획득으로 이어지는 ‘미래’의 첫출발일 수 있다. 그런데 미래만이 아니다. 수험생의 ‘과거’도 자유롭지 못하다. 고등학생, 중학생, 심지어 초등학생 때의 삶도 입시에 묶여 있었다. 나는 입시가 수험생의 ‘과거’에 미치는 영향이 더 두렵다.

현재의 수능보다 더 교육적인 평가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여러 시도도 해보았다. 그러다가 경쟁의 ‘불공정함’이 복병처럼 튀어나오면 ‘국가고사’로 회귀했다. 지금 ‘정시 확대’도 그런 상황이다. 우리 사회에 공정함과 신뢰가 뿌리내리지 않는 한, 수능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수능은 좋은 시험이어야 한다. 청소년기의 그 찬란한 시간을 몇 년씩 보낼 만한 가치가 있는 시험이어야 한다.

2021 수능 영어시험을 풀어봤다. 긴 지문을 읽고 한 문제를 거의 1분 안에 풀어야 하니 처음부터 마음이 허둥댔다. 찬찬히 읽으면 망한다. 그래서 보기부터 확인하고 대강 읽고 답을 찍었다. 영어시험 하나 봤을 뿐인데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니 9시간 동안 마스크를 쓰고 일곱 과목을 이렇게 치른 수험생들, ‘수능전사’라고 불러줘야 한다. 만 열여덟 살 성년식을 힘들게 마쳤다. 모두 수고했다. 진정.

이스트본(영국)=이향규 <후아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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