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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n]클라우드 저장 성착취물은 삭제 안 하나요?

수사기관, 촬영·저장매체만 압수수색 뒤 방관 잦아… 피해자는 불안
등록 2020-11-29 11:43 수정 2021-05-05 12:30
2020년 4월7일 경기도 의정부시 경기북부지방경찰청에서 열린 인터넷 메신저 ‘디스코드’ 성착취물 채널 운영자·유포자 검거 브리핑에서 디지털성범죄 특별수사단이 압수물품을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0년 4월7일 경기도 의정부시 경기북부지방경찰청에서 열린 인터넷 메신저 ‘디스코드’ 성착취물 채널 운영자·유포자 검거 브리핑에서 디지털성범죄 특별수사단이 압수물품을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21>이 디지털성범죄를 정리하고, 앞으로 기록을 꾸준히 저장할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열었습니다. 11월27일 나온 <한겨레21> 1340호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1년동안 일궈온 성과와 성찰, 그리고 여전히 남은 과제로 채웠습니다. 이곳(https://smartstore.naver.com/hankyoreh21/products/5242400774)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다 (삭제를) 못했어요, 분명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11월4일 <한겨레21>과 만난 이도연(가명)씨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떨궜다. 그는 전 남자친구로부터 디지털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가해자는 이씨가 목욕하는 장면 등 밝혀진 것만 수십 차례 촬영했고 이를 인터넷 성인카페 회원과 교환했다. 가해자와 교제한 지 3년여 흐른 뒤에야 이씨는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추궁 과정에서 본 가해자가 사용하는 클라우드 계정에는 이씨의 피해 촬영물뿐 아니라 성인카페 회원에게서 전송받은 여성의 나체 사진이 가득했다. 범행을 위한 ‘세컨드 계정’(타인 명의로 만든 계정)으로 보였다.

가해자 처벌 뒤 남은 ‘세컨드 계정’

2020년 여름, 1심 법원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의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 등으로 기소된 가해자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와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취업 제한 3년도 명령했다. 촬영장비였던 휴대전화는 몰수됐다.

그러나 이씨는 여전히 불안하다. 그날 이씨가 목격한 그의 클라우드 계정이 압수·수색되지 않았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경찰은 가해자의 클라우드를 살펴봤고 피해물을 찾지 못했다고 이씨에게 말했지만, 그는 가해자의 세컨드 계정이 기억에 선명하다. “저는 아직도 제 피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요.” 경찰 관계자는 ‘세컨드 계정’ 압수수색 여부를 묻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오래된 일이어서 기록을 봐야겠지만, 계정에 담긴 사진이 범죄가 성립 안 되거나 영장이 발부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디지털성폭력은 ‘불안 피해’를 남긴다. 피해자는 가해자 수중에 피해 촬영물이 여전히 존재하고 언제든 그 영상이 재유포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경찰은 관련 규칙(디지털 증거의 처리 등에 관한 규칙)에 따라 범행에 사용된 촬영 기기와 저장매체 자체를 압수한다. 그러나 불법촬영물은 촬영되는 순간 다양한 경로로 복제물을 생성하고 저장된다. 휴대전화는 물론 동기화된 클라우드 계정에도 저장될 수 있다. 물리적 저장매체뿐 아니라 비물리적 저장공간까지 광범위하게 확인하고 복구 불가능한 방식으로 폐기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일선 경찰서에 따라 클라우드 압수수색 여부는 천차만별이라고 성폭력 활동가와 변호사는 지적한다. 이씨를 지원·연대하는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는 “수사기관 역량에 따라 클라우드 계정까지 압수수색 여부가 그때그때 달랐다. 가해자한테 ‘지금 휴대전화에 저장된 게 전부냐’ 묻고는 그 밖의 비물리적 저장공간까지 적극적으로 살피는 수사기관은 드물었다”고 했다.

국선 전담 변호사로 여성·장애인 피해자를 지원하는 신진희 변호사는 “디지털성폭력 범죄의 특성상 명백한 증거가 있기 때문에 가해자가 자백하고 휴대전화를 임의제출하면 수사기관은 압수수색 필요성을 더는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경찰은 디지털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사이버수사과에 가해자의 클라우드를 적극 압수·수색하라는 지침을 내려보내고 있다.

클라우드 저장물 몰수·폐기는 복불복?

검찰도 ‘n번방’ 사건(텔레그램 성착취)을 계기로 클라우드 등 저장매체에 ‘잘라내기’ 방식의 압수수색을 처음 도입했다고 밝힌 바 있다. 휴대전화나 컴퓨터뿐 아니라 클라우드 저장소에 보관된 성착취물 원본을 복제해 압수하고 원본은 삭제하는 방식이다.

이전에는 원본 파일을 복제해 압수하는 방식만 인정됐기 때문에 피의자 동의가 없으면 원본 삭제가 어려웠다. 검찰은 형사소송법(제106조 3항과 제120조)에 근거해 ‘잘라내기’ 함으로써 수사·재판 기간 동안 클라우드에 남아 있는 원본이 다른 저장매체로 이동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법원에서 선고하는 몰수·폐기형을 실효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검찰은 해외 클라우드 업체에 대해서도 형사사법공조를 통해 성착취물 파일 삭제를 요청했지만 아직 상대국에서 영장 집행 결과를 회신받은 곳은 없다(11월20일 기준). 검찰 관계자는 “어느 나라에 있는지 소재지가 불명확한 업체도 있어 수 개국에 요청하기도 한다. 또 해당국 외교부, 법무부 등을 거치면서 시간이 적지 않게 소요된다”고 했다.

2019년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가 성폭력 피해자 64명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성착취물의 완전한 폐기가 이뤄질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재판이 `’피해 복구에 대한 희망을 주기보다는 처벌형량을 선고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통상 압수된 촬영장비와 불법촬영물의 몰수나 폐기를 선고하는 건 법원 몫이다. 그 집행은 검사가 한다. 대법원 양형연구위원회가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 1심 판결 164건(2018년 1월~2019년 4월, 서울중앙지법)을 분석한 결과 10건 중 9건(91.46%·150건)에서 몰수가 선고됐다. 불법촬영 장비나 영상물은 판사 재량에 따른 임의적 몰수 대상이지만, 압수물이 존재하면 되도록 몰수를 선고하는 추세다. 그러나 피해자 불안감은 여전하다. 판사의 클라우드 서비스나 전자 정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 몰수·폐기 대상이 촬영기기에 국한돼서다.

수사 단계에서 위치 특정 노력 선행돼야

이런 문제 제기에 법원은 전자파일의 전방위적인, 그리고 복구 불가능한 몰수·폐기 방안을 고민한다. 2019년 11월 수원지법 형사15부(재판장 송승용)는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한 20대 회사원에게 2년6개월 실형을 선고하면서 휴대전화와 유심칩을 몰수하고 휴대전화에 저장된 전자 정보를 폐기하라고 밝혔다. 전자파일 형태의 성착취물 폐기를 한 번 더 강조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인천지법 형사14부(재판장 임정택)도 휴대전화, 외장하드를 몰수하고 수사기관에서 압수한 클라우드 파일을 폐기하라고 주문했다.

수사기관에 의해 불법촬영물이 압수되지 않거나 검찰 구형이 없더라도, 법원이 선제로 불법촬영물을 폐기하라고 주문하는 게 가능하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압수수색이 충분히 이뤄지고 불법촬영물의 저장 위치 등이 특정돼야 그마저도 가능하다는 게 판사들의 항변이다. 한 판사는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확인되지 않은 전자파일에 폐기 주문을 내리는 건 아무래도 무리”라고 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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