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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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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때마다 가해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리셋이 만난 eNd…재판 방청 연대하려 연차 쪼개고 법원 옆 카페에서 온라인수업 듣는 ‘짬내기의 달인’들
등록 2020-11-28 13:34 수정 2020-12-02 08:16
1340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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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이 디지털성범죄를 정리하고, 앞으로 기록을 꾸준히 저장할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열었습니다. 11월27일 나온 <한겨레21> 1340호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1년동안 일궈온 성과와 성찰, 그리고 여전히 남은 과제로 채웠습니다. 이곳( https://smartstore.naver.com/hankyoreh21/products/5242400774)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익명의 여성들이 모였습니다. 이름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의 목표를 위해, 디지털성범죄를 근절하고 여성이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합니다.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eNd)는 리셋과 함께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공론화하고 범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eNd는 리셋처럼 익명의 여성들이 모여 조직했습니다. 철저한 익명성을 바탕으로 카카오톡 오픈채팅이나 디스코드(채팅 메신저) 등을 통해 소통하는 모습은 ‘같이’ 있지 않더라도 ‘같이’ 할 수 있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피해자 2차 가해 막기 위해 사법부 감시

“사법부를 감시하는 가장 큰 이유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막기 위함이다. 방청연대를 통해 미약하지만 사법부가 점차 바뀌고 있다.” eNd는 2020년 초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시위는 한 차례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서면 인터뷰에서 eNd는 “상황이 나아지면 반드시 시위를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대신 재판 방청, 즉 사법부 감시 위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Nd는 서울·인천·수원·춘천·대구·안동 등 전국의 법원을 찾아가 방청 지원을 하는 등 각 지역 여성들과 연대합니다.

eNd 활동가들은 법정에서 부득이하게 얼굴을 마주칠 경우가 아니면 개인 신상정보를 유추할 수 있는 질문을 금하고, 서로 실명도 밝히지 않습니다. 개인 신상 보안에 신경 쓰는 이유는 서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디지털성착취 단체대화방에서 ‘신상털기’가 빈번히 일어나는 만큼, 개인정보가 노출되면 협박 등으로 이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노력이 무색할 때도 있습니다. 언론과 사전에 협의했지만, 기자회견이나 시위에 참여한 활동가 모습이 모자이크 처리되지 않은 채 노출되기도 합니다. 2020년 7월 시위를 진행했을 땐, eNd를 불법촬영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디지털성착취 범죄를 규탄하러 모인 자리에서도 불법촬영을 우려해야 하는 현실이 다소 씁쓸하게 다가왔다. 가해자 신상은 법원과 사회가 나서서 보호해주는데, 왜 피해자와 연대자는 익명성을 보호장치로 택해야만 하는가.” 여러분께 묻고 있습니다.

eNd 활동가들은 ‘짬내기’의 달인들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학교 수업이 온라인으로 진행되자, 법원 근처 카페에서 강의를 듣기도 합니다. 직장인들은 연차를 쪼개가며 재판 방청을 합니다. 프리랜서로 현업에서 일하는 한 활동가는 근무 중에 (허락을 구하고) 법정에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7월23일에 있었던 ‘조주빈과 공범들의 범죄단체조직죄’ 재판 땐, 방청 인원이 미달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방청 인원이 줄어들면, 가해자들이 안심하고 판사도 재판에 소홀해질까봐 ‘나라도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족 피해 못 참으면서 그런 범죄를…”

법정에서 가해자들을 만나야 하는 eNd 활동가들은 자주 분노합니다.

“피고인 쪽이 뻔뻔하게도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할 때, 박사방 공범인 강훈의 변호사가 성착취물을 ‘야동’이라고 불렀을 때, 터무니없이 낮은 형량의 판결이 내려질 때는 판사에게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난다.”

“선고를 앞둔 조주빈 외 5명은 재판장에 들어와 피고인석에 서면 방청석을 한 번 훑는다. 그중 한 명과는 지난 재판부터 계속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듯한 태도였다.”

“와치맨 전아무개씨는 재판에서 ‘자신이 저지른 점은 반성하지만, 자신 때문에 가족이나 지인이 피해받고 고통받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자기 가족이 겪는 피해는 못 참는 사람이 어떻게 피해자들에게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모순적이고 역겹다.”

“갓갓(n번방 운영자)의 공범 안승진은 최후 발언을 종이에 적어와서 읽었다. 검사의 징역 20년 구형에 안승진은 ‘저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짐승과 괴물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진심 어린 반성이 아닌 억울함 가득한 불평 같았다. 또 문형욱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재판에 집중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증거조사 중에 ‘화장실이 급하다’며 휴정하게 한 적도 있다.”

누군가는 분노해서, 누군가는 단 한 명의 여성이라도 더 구하려고, 누군가는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 각자 계기는 다르더라도 피해 확산 방지와 디지털성범죄 근절, 그리고 가해자들의 강력 처벌이라는 목표는 같습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들의 옆에 서서 직접 싸울 때’라고 eNd가 보내준 답변을 읽으며, 리셋의 원동력 또한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Nd 재판 방청 활동가는 다음 카페(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cafe.daum.net/N.487634467)에서 상시 모집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제주나 충북 청주는 팀 내 재판 방청 인원이 없어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방청은 시작하기만 하면 이게 뭐라고 망설였을까 싶을 정도로 쉽다고 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해봅니다. 팀에 합류하면 내부에서 간단한 방청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개인적으로 방청을 원하시는 분은 eNd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재판 일정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제주나 충북 청주, 적극적인 참여 기다려요

익명이기에 활동가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될 수 있는 그 익명의 개인들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어디엔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용기를 얻습니다. 그 용기가 다른 여성들에게 퍼져나간다면 하나의 큰 목소리가 되어 사회에 파동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eNd는 익명의 활동가들에게 말합니다. “현업과 병행하며 용기 내어 활동하는 모든 활동가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모든 활동가가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우리 사회가 미약하지만 꾸준히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세상을 바꾼 위대한 여성 운동가들로 기억될 것입니다.”

리셋(Re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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