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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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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하고 성실한 여성들의 분노는 나의 힘

DSO가 만난 리셋… 8만 장 탄원서 모으고 릴레이 포스트잇 주간 열어
“거창하지 않아도 꾸준하게 분노를 표하는 여성들이 힘을 줘”
등록 2020-11-28 13:30 수정 2020-11-30 02:31
최서희 리셋 활동가의 다이어리에는 리셋의 활동으로 일정이 빼곡하다. 리셋 제공

최서희 리셋 활동가의 다이어리에는 리셋의 활동으로 일정이 빼곡하다. 리셋 제공

<한겨레21>이 디지털성범죄를 정리하고, 앞으로 기록을 꾸준히 저장할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열었습니다. 11월27일 나온 <한겨레21> 1340호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1년동안 일궈온 성과와 성찰, 그리고 여전히 남은 과제로 채웠습니다. 이곳( https://smartstore.naver.com/hankyoreh21/products/5242400774)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2015년 성착취물 사이트 ‘소라넷’을 폐지하기 위해 여성들이 모였다. DSO(디지털 성폭력 아웃)는 입법 운동,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를 ‘디지털성폭력’으로 대체하자는 인식 개선 운동을 시작으로 디지털성폭력 근절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2019년 12월 DSO는 5년 동안 걸어온 길에 마침표를 찍었다.

DSO가 활동을 멈춘 그때, 프로젝트 리셋(ReSET)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텔레그램 내에서 성착취 단체방을 검색했더니 무수히 많은, 이른바 ‘n번방’이 발견됐다. ‘성착취 미디어가 유포되는 채널과 유포자를 신고해 해당 경로를 차단하고 2차 피해를 최소화한다.’ 목적은 명확했다. 디지털 공간에서 잃어버린 여성의 안전을 다시(Re) 세우는(SET) 것이다. 이를 위해 1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리셋은 조주빈과 문형욱을 비롯한 일부 가해자가 재판에 넘겨진 지금도, 성범죄 근절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을 묻는 말에 우스갯소리처럼 답한다. “1~2년 걸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를 아예 리셋해 다시 시작하는 게 제일 빠르고 편하지 않을까요.”

전국 버스정류장·화장실·전봇대에 포스트잇을

디지털 공간은 가해자가 활개 치는 그들만의 공간일까. 디지털은 가해자의 놀이터가 아니라는 게 리셋의 생각이다. 디지털 공간에는 가해자뿐 아니라 대항하는 활동가가 존재해왔다.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받으며 외면하고 배제됐을 뿐이다. 리셋은 아직도 디지털 공간 안에서 날뛰는 범죄자들을 매일 모니터링해 기록한다. 텔레그램, 디스코드, 트위터 등 가리지 않는다. 음지로 숨는 가해자들을 쫓으려 경찰과도 협조한다. 이렇게 적발된 가해자가 합당한 처벌을 받는 데도 목소리를 보탠다. 그것의 하나로 리셋은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eNd팀과 함께 시민들로부터 8만 장의 엄벌 탄원서를 모아서 11월13일 서울중앙지법 조주빈 담당 재판부에 제출했다. 자그마치 33개 상자다. 리셋은 말한다. “디지털 공간의 주권을 가져오기 위해 우리는 연대해야 합니다.”

연대는 온·오프라인 공간을 넘나든다. 리셋은 2020년 8월 릴레이 포스트잇 주간을 개최했을 때를 떠올렸다. 전국 곳곳에 디지털성범죄 엄벌·근절을 염원하는 포스트잇과 스티커를 붙이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오프라인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개개인이 일상에서 디지털성폭력 근절 운동에 참여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전국 각지의 여성단체와 여성주의 공간이 화답해줬다. 예상보다 높은 호응에 애초 예정된 행사 기간을 1주에서 3주로 연장했다. 전국 버스정류장, 화장실, 전봇대, 지하철역 계단에 스티커와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었다. ‘#n명의연대자_n명의감시자_우리가여기있다.’ ‘어제의 판결은 오늘 또 다른 범죄자의 용기가 된다.’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디지털성범죄에 분노하는 여성들을 볼 때 연대감을 느껴요. 끝도 없이 쏟아지는 성범죄에 여성들이 꾸준하고 성실하게 분노하고 있다는 게 확인될 때마다 이상하게 힘이 납니다. 나의 분노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때로 큰 위로가 돼요.”

국제 청원 사이트에서 청원 활동

리셋의 말처럼 여성들의 연대는 힘이 되지만 때때로 공격 대상이 되기도 한다. DSO도 활동 당시에 협박이나 욕설을 비롯해 여러 차례 외부 공격을 받았다. SNS 일대일 메시지로 신변을 위협하는 사람, 외부 행사에 참여할 때 면전에서 욕설을 내뱉는 사람도 마주해야 했다. 리셋도 다르지 않았다.

특정 ‘포르노’ 사이트에서 n번방 영상, 박사방 영상이 인기 검색어에 등장했다. 그 사이트는 n번방 영상을 보유하고 있다며 광고까지 했다. 리셋은 이 사이트를 폐쇄하자는 국제적인 청원 활동도 홍보했다. 해당 청원은 2월11일 국제 청원 사이트에 게시됐는데 지금까지 청원에 참여한 사람이 100만 명 이상이다. 이미 존재하던 국제 청원을 홍보했을 뿐인데 리셋의 트위터 공식 계정으로 인신공격과 모욕성 발언이 쏟아졌다. “미국에서는 ‘포르노’가 합법인데 뭐가 문제냐.” “여성 생존권을 위해 자위할 권리를 박탈하겠다는 거냐.” “한국 여자들이 그래봤자 뭐가 바뀌겠냐.” “너희 아빠는 안 보는 줄 아냐.” 이들은 오로지 리셋을 비난하기 위해 계정까지 따로 생성하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셋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며 웃었다.

“활동 초기부터 활동가들의 정신 건강과 일상을 지키기 위해 계정 담당자에게는 모든 알림을 꺼두라고 당부해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아요. 활동가들에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 ‘일상’이에요. 논리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벌이는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갈등에 시간과 마음을 쓰지 않았으면 했어요.”

사실 지치지 않고 운동을 이어나갈 방법을 찾는 것은 모든 단체의 공통적인 고민이다. DSO 활동을 비롯해 5년여 디지털성폭력 근절 활동을 이어오면서 나도 ‘번아웃’(정서적 탈진)을 경험했다. 어찌 지내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할 뿐이다. 리셋은 활동가들에게 매달 최장 2주의 휴식 기간을 보장하고 모니터링하는 활동가에게는 심리 상담을 지원한다. 인권운동과 활동가로서의 삶을 병행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인권운동은 지속적으로 이어질 때 가장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게 리셋의 판단이다.

계속 싸우기 위하여

“디지털성범죄와 성착취는 한 개인 혹은 한 단체의 힘으로 근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지금은 어느 때보다 동일 의제에 동의하는 집단들이 결속력을 다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삶을 살아온 전혀 다른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디지털성폭력’ 근절이라는 단 하나의 의제 아래에 모였습니다. 끝까지 연대하겠습니다. 그 연대의 힘이 리셋 밖 여성들에게도 닿기를 바랍니다.”

하예나 전 디지털성범죄아웃(DSO·Digital Sexual Crime Ou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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