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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n]피해자는 활동가가 됐고 연대자가 됐다

eNd가 만난 마녀… 2014년 재판 방청 연대 시작해 사법부 변화 이끌어
“감시자 없을 때 사법 시스템은 변질, 붕괴할 수 있다”
등록 2020-11-28 12:54 수정 2021-05-05 12:35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를 상징하는 일러스트 로고. 마녀 제공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를 상징하는 일러스트 로고. 마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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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이름과 나이, 직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활동은 대부분 안다.

마녀는 2014년부터 ‘재판 방청 연대’를 시작했다. 끈질기게 성범죄를 판단하는 사법부를 감시한다. 이제 많은 성범죄 재판에서 사법부를 지켜보고 피해자와 연대하는 여성들이 있다. eNd도 그중 하나다. 마녀는 마모되지 않고 끈질기게 활동하고 싶다. 우리도 그러려고 한다. 마녀는 피해자들이 부디 살아주기를 바란다. 우리도 간절히 바란다.

우리, eNd팀은 마녀의 이름과 나이, 직업을 모른다. 대신 더 많은 것을 마녀한테 배웠다. 어떻게 연대해야 할지,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지. 마녀는 최근 연대자 D(이하 D)로 활동명을 바꿨다. 마녀로 일궈온 활동이 마녀라는 이름에 갇히길 원치 않았다. 언제든 대체 가능한, 젊은 여성의 연대 활동을 뒷받침하는 자리에 있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강하‘디’강한, 깊‘디’깊은, 그럴 때 쓰는 ‘디’, 연결하는 어미 ‘디’에서 새 활동명을 따왔다. 데블, 데인저, 드림… 어떤 D로 이해하든, 괜찮다. D는 한때 피해 생존자였으나, 활동가가 됐고, 물론 연대자이며, 또한 개인이다. 피해자 D, 활동가 D, 연대자 D, 개인 D의 고민과 바람을 듣는다. 배운다.

“연대 활동은 내 피해를 회복하는 과정”

2010년부터 2014년까지 D는 성범죄 피해자였고 사법 피해자였다. 2010년 아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몇 개월 지나 고소했다. 물증은 남지 않았다. 가해자가 오히려 D를 고소했다. 보복 소송이었다. 민형사 소송이 마무리되기까지 4년 동안 싸웠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생겼다. 이름 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트위터를 소개받았다. 자신의 경험을 먼저 말했다. 나 같은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더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어느덧 활동가로 불렸다. 계획하지 않은 일이다. “활동은 내가 겪은 피해를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활동가 D는 매일 트위터에 성범죄 사건 정보를 올리고 기사를 공유한다. 전자우편에 답하고 교육도 한다. 최근에는 춘천지방법원에서 열린 ‘프로젝트n번방’(일명 제2의 n번방) 사건 재판을 지켜봤다. 춘천여성민우회에 재판 모니터링 교육을 했다. 재판부 앞에 선 피해자를 직접 돕기도 한다. 피해자를 만나고, 재판에 제출할 문서를 작성하고, 언론 인터뷰를 할 때 피해자 옆자리에 앉아 있다. 그럴 때 D한테는 “사법 피해자, 약자, 소수자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희망과 믿음”이 있다. 단단하다. 그 바탕에는 홀로 법정에 서야 했던 피해자 D의 고통이 있다. “다른 피해자들만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말고, 피해를 회복하고 일상을 재구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후원받지 않는 이유

활동가 D가 문을 연 재판 방청 연대 속에 사법부는 느리게나마 변하고 있다. 피해자 목소리가 닿지 않는 보수적인 구조, 합리적 근거 없이 오로지 관성에 기댄 작량감경(법률적으로 특별한 사유가 없더라도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다고 판단될 때, 법원이 그 형을 줄이거나 가볍게 하는 것),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에 2019년부터 균열이 가는 조짐이 보인다. 사법부가 피해 당사자들과 현장 활동가를 초청해 경청한다. 피해자 증인 신문이나 증거 조사 과정에서 추가 피해를 막으려는 노력도 한다. 1심에서 무죄를 받았던 사건을 2심에서 유죄로 뒤집기도 한다. 피해자 D가 겪은 것과 같은 보복성 고소에 무죄를 선고한다. 한때 방청 연대조차 여론 재판이라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던 사법부가, 점차 달라지고 있다.

아쉬운 판결도 있다. D는 미국 송환 불허 결정이 난 손정우 범죄인 인도 재판을 떠올린다. 검찰 구형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형량을 받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재판도 있다. D는 실망하지 않는다. “완전히 무의미한 재판은 내 입장에서는 없었다. 개별 사건의 결과로서 부족하지만, 이후 다른 재판과 비교 분석하는 등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실망스러운 판결 앞에, 길게 생각하며 지금 덜 실망하는 쪽을 택한다.

D는 개인이다. 단체를 꾸리지 않았다. 후원도 받지 않는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연대 활동을 시작한 초기 “무너진 내 일상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활동과 동시에 하다보니 어려움을 느꼈다”. 그런 때 “일반인으로서 나와 연대자로서 나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작업을 통해 균형을 맞췄다”. 활동가 D와 개인 D를 구분해야 지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혼자 후원 업무까지 처리하다보면 진짜 연대에 쓸 시간이 줄어든다. 그 시간에 “본업을 늘려, 직접 번 돈으로 연대하는 게 낫다”고 느꼈다. 직접 돈 벌어서 활동해야 하므로, 연대하는 시간 바깥은 거의 본업으로 채워진다. “정기적인 휴일은 없다.” 다만 어디까지나 개인 D의 이야기라고 선을 긋는다. “활동가로서 세운 원칙과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후원받지 않는 것일 뿐 단체 활동에는 후원이 필요하다. 후원은 활동가들한테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활동가 D와 개인 D 사이의 긴장은, 새로운 목표를 제시한다. “감시자가 없을 때 사법 시스템은 변질하고 붕괴할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일반인들이 본인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각 재판을 쫓아다닐 수는 없다”. 방청 연대는, 지지하는 누군가가 있음을 사법부에 보여주는 수준을 넘어, 목격·기록·감시의 영역으로 발전하고 있다. 더 많은 품이 든다. 개인의 선의에만 기대기 어려운 일이다.

D는 2021년부터 ‘시스템 감시’를 구축하는 데 골몰할 계획이다. 방법은 이렇다. 여러 연대자를 모으고 그들을 교육한다. 연대하는 다수의 개인이 감시 영역을 나눈다. 체계적으로 재판을 기록하고 분석해 문제를 발견한다. 출발은 교육이다. D는 ‘판결문 톺아보기’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청소년 대상 자료도 따로 만든다. 2020년 한 해 디지털성폭력 사건 재판에 참여한 연대자를 불러 모아 발표하는 자리도 만들 생각이다.

활동가 D와 개인 D를 철저히 분리하고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해도, 성범죄 사건을 따라가며 정신적으로 겪는 고통은 어쩔 수 없다. 많은 연대자가 겪는 일이다. 가끔 피해자의 사망 소식을 들을 때 특히 괴롭다. 그럴 때면 “다른 피해자들에게라도 ‘삶’이라는 선택지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버틴다. 그러기 위해 활동을 지속해야 하고, 지속하기 위해 지치지 말아야 한다. 다른 활동가들한테 D가 하고 싶은 말이다. “피해자의 말, 시간,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함께해주시는 활동가분들께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다만 한 가지, 부디 스스로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연대도 활동가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의미 없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쉬어야 할 때 쉬고,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십시오. 호흡을 길게 가져가면서 하나씩 해나갑시다. 그럴 수 있어요.”

피해자로 4년, 활동가로 6년

그리고 한때 자신이었던, 어느 순간 다시 자신일지 모를 피해자에게 말한다. 피해자로 4년, 활동가로 6년을 지내며 겪은 것들, 본 것들, 만난 이들 때문에 간절함은 더하다. “당신들과 앞으로의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요. 당신 곁에서 무언가 할 기회를 주세요. 어떻게든 바꿀 테니 가지 말고 부디 있어주세요. 당신이 말하는 것과 당신들의 시간이 단단한 현재 위에서 미래를 향할 수 있게, 당신들이 원하는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노력할게요.”

eNd(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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