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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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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이익은 1조6천억원, 손해배상은 59억

비료회사 16년간 부당이익 1조6천억원, 농민 1만7천 명 손배소송 8년 만에 59억 받아내
등록 2020-11-22 12:20 수정 2020-11-26 00:54
2020년 11월16일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부의장인 위두환씨(왼쪽)와 신성재씨가 서울 용산구 전농 사무실에서 비료 담합 소송의 과정과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2020년 11월16일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부의장인 위두환씨(왼쪽)와 신성재씨가 서울 용산구 전농 사무실에서 비료 담합 소송의 과정과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승소해서 기쁜 마음보다는 화가 났어요. (비료회사들은) 1조6천억원을 부당하게 챙기고서 농민 한 사람당 33만원씩만 배상한다고요? 그것도 소송을 낸 지 8년 만에. 비료회사 입장에선 너무 남는 장사 아닌가요?”

농민들의 기나긴 집단소송을 이끈 위두환(2012년 소송 당시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씨는 “승소했지만 여전히 분노가 차오른다”고 했다. 2020년 10월30일 서울중앙지법은 남해화학 등 비료회사 13곳이 농민 1만7천 명에게 총 58억8천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농민들이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을 통해 집단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지 8년 만에 나온 결과다. 그러나 손해로 인정된 액수는 이자(지연손해금)까지 합쳐도 농민 1명당 평균 33만원가량, 전부 합쳐도 58억8천만원에 불과하다. 최종 판결이 확정되면, 소송에 참여한 농민들은 피해 정도에 따라 배상금을 달리 받는다.

과징금 828억·피해 농민 배상금 59억에 불과

이 집단소송은 2012년 시작됐다. 그해 1월, 공정거래위원회는 농협중앙회 등이 실시하는 입찰에서 물량과 가격 등을 짬짜미(담합)한 화학비료 제조업체 13곳을 적발했다. 이들의 짬짜미는 1995년부터 2010년까지 16년이나 계속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공정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비료회사들이 입찰 전에 비료 가격을 미리 정하는 바람에 농민들이 비료를 사는 데 드는 비용이 해마다 1천억원가량씩 늘었다. 비료회사들이 16년 동안, 1조6천억원을 부당하게 챙긴 것이다. 2012년 공정위는 이들 업체에 과징금 828억2300만원을 부과했다.

2012년 3월, 전농은 지역농민회를 통해 비료회사들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원고로 참여할 소송인단을 모집했다. 농민 1명당 1만원씩 참여비를 받아 소송비용으로 쓰기로 했다. 전북 무주군 무풍면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이정구(54)씨도 소송에 참여했다. “지역농민회에서 소송에 관해 설명하러 마을에 왔더라고요. 무풍면 농민들은 농사짓는 면적이 크다보니, 1년에 비룟값으로 적게는 300만원, 많게는 1천만원 가까이 쓰죠. 그동안 농협을 믿고 농협에서 비료를 사서 썼는데 배신감이 컸어요. 당장 소장을 썼어요.”

당시 강원도 홍천군 농민회장이던 신성재(55)씨는 마을 곳곳을 다니며 소송 필요성을 설명하고 소장을 받았다. 대부분 농민이 소송 취지에 공감했지만, 문제는 관련 서류를 만드는 일이었다. “평생 법원 근처에 갈 일 없는 농민들이 소장을 어떻게 쓰겠어요. 심지어 한글이나 주민등록번호를 쓸 줄 모르는 분들도 계셨어요. 이런 분들에게 자필로 소장을 쓰게 하는 일이 쉽지 않았죠.”

서류 준비가 어렵고 농번기인데도 전농 사무실로 소송에 참여하겠다는 서류가 전국 각지에서 밀려들었다. 전농 실무진은 소송인 명단을 취합하고 증빙 자료를 모아, 2012년 9월 농민 1만8천여 명이 원고로 참여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12년 2월13일 전북 전주 농협 앞에서 열린 ‘비료 담합 소송 기자회견’에서 농민들이 담합에 항의하는 뜻으로 농협 현관에 비료를 뿌리고 있다. 연합뉴스

2012년 2월13일 전북 전주 농협 앞에서 열린 ‘비료 담합 소송 기자회견’에서 농민들이 담합에 항의하는 뜻으로 농협 현관에 비료를 뿌리고 있다. 연합뉴스

1994년·1997년 농민들이 어려운 시기에

전남 장흥에서 1983년부터 벼·작두콩·생강 농사를 짓던 위두환씨가 ‘비룟값이 올랐다’고 체감한 시기는 2000년대 초반이었다. “물가가 많이 올랐으니 비룟값도 올랐나보다 생각했죠. 비료회사들이 담합한 것 아니냐는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은 없었어요.” 그러다 2012년 공정위 발표를 봤다. 위씨는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1997년 IMF 외환위기 영향으로 죽어가는 농민들을 비료회사들이 16년이나 뜯어먹은 줄을 몰랐다”며 “로드킬 당해서 이미 죽은 고라니의 살점까지 뜯어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 판결문에 따르면, 국내 비료 시장 규모는 연간 1조8379억원(2009년 기준)으로 남해화학·동부하이텍·풍농 등 매출 상위 업체 9곳이 시장의 90% 이상을 점한다. 또한 농사에 쓰이는 비료는 크게 일반 화학비료와 유기질비료로 나뉘는데, 화학비료가 90% 가까이 된다. 짬짜미에 13개 업체가 가담했으니, 사실상 국내 비료업체 전체가 농민들을 상대로 부당이득을 챙긴 셈이다.

농민들이 소송을 제기한 뒤에는 더 큰 산이 남아 있었다. 비룟값 짬짜미로 인한 피해액을 계산하려면,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비료를 구매한 기록이 필요한데, 이 기록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농민들이 농협을 통해 비료를 살 때, 대부분 수기로 기록해 남아 있는 자료가 없는 탓이었다.

2012년 당시 전농 사무처장이던 이대종(59)씨도 비료 구매 기록을 구하지 못해 자신은 정작 원고로는 참여하지 못했다. “한 해에 한 가지 농사만 지어도 작물이 들어가기 전, 들어간 뒤, 수확할 때 서너 번 비료를 투입해요. 저는 벼농사와 잔디농사를 짓는데, 1년에 비룟값으로 250만∼300만원 정도를 써요. 비료 종류도 다양하고요. 그런데 소송 당시엔 기록을 전산화하지 않아서, 소송에 참여하려면 지역 농협에 직접 가서 기록을 받아와야 하는데 주중엔 서울에서 전농 업무를 했으니 그럴 수가 없었죠.”

승소했지만 배상금 계산도 처리해야

이뿐이 아니다. 16년에 걸쳐 짬짜미가 진행된 탓에, 중간에 비료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지역 농협마다 자료를 정리하는 방식도 달라서, 소송인단 개개인 자료를 다시 정리하고 전산화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원고마다 피해 금액을 산정하는 과정도 복잡했다. 원고 쪽을 대리했던 송기호 변호사(법무법인 수륜아시아)는 “공정위가 과징금 액수뿐만 아니라 짬짜미한 제품별 부당이득액을 산출해서 공개해야, 소비자가 기업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낼 때 손쉽게 활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반 소비자가 피해액을 산정하기가 쉽지 않고 시간과 비용도 많이 드는데, 이렇게 소송 준비에 시간이 걸리는 사이 불법행위를 한 기업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할 소멸시효 3년이 지나가버리기도 한다”고도 그는 덧붙였다.

소송을 낸 지 5년이 지난 2017년에야 손해배상 청구액이 총 85억원으로 산정됐다. 짬짜미가 없었다면 비룟값이 얼마였을지 가상의 가격을 계량경제학적으로 분석한 뒤, 물가지수와 환율 등을 고려해 원고 각자의 피해액을 추산해야 했기 때문이다. 김범수 고려대 교수(경제학)가 연구용역을 맡아, 피해액을 따졌다. 이 추산액 등을 참고해 2016년 10월, 법원은 “담합으로 인해 7종류 비료의 (짬짜미한) 입찰 가격이 ‘가상의 가격’보다 2.05~16.3%가량 높게 유지됐다”는 감정 결과를 내놨다. 소송에 참여한 원고인단 중에서 개별 피해액이 0원으로 추산되거나 소송 관련 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1천 명가량은 빠져야 했다.

소송인단을 모집하는 데 6개월, 1심 결과가 나오는 데 8년이 걸리는 동안 이 소송을 잊거나, 이사하거나, 숨진 농민도 꽤 있다. 그래서 신성재 전농 부의장은 승소하고 나서 농민들에게 배상금을 계산해 돌려줄 일이 걱정이다. “그동안 들어간 소송비용을 뺀 다음 원고 각각 배상금을 계산해서 나눠주는 일이 남았어요. 숨진 원고가 있다면 상속인도 찾아야 하고요. 피해자가 피해를 입증해 소송에서 이겼는데, 이기고 나서 그 피해를 복구하는 것도 피해자가 하라니, 너무 불합리하지 않나요?”

소송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한 사람당 평균 33만원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게 됐지만, 나머지 농민들은 배상받을 길조차 없다.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소멸시효 3년이 지났기에 다시 소송을 낼 수도 없다. 무주군에서 배추와 사과 농사를 짓는 정도화(54)씨는 “2012년 소송인단을 모집할 때는 농번기라 소송 자료를 준비할 시간이 없어 소송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런 농민들이 주변에 많았는데, 지금은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 소송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손해를 입은 농민들은 다 구제받는 제도가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피해 농민은 100만 명이 넘는데

전문가들이 집단소송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집단소송제는 기업의 고의나 과실로 대규모 소비자 피해가 생겼을 때, 소비자 50명 이상이 손해배상 판결을 받으면 모든 피해자가 소송 없이도 배상받도록 하는 제도다. 법무부는 9월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현재 증권 분야에만 도입된 집단소송제를 모든 분야로 확대하자는 취지다.

송기호 변호사는 “비료 시장 전체에서 짬짜미가 발생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기에 실제 피해 농민이 100만 명 넘을지도 모른다”며 “기업 짬짜미로 인한 피해자가 직접 피해를 입증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피해액도 계산해야 하는 등의 어려움 때문에 소송을 포기하는 현실을 바꾸려면 집단소송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주=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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