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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하면 그랬겠나”하는 판결이 악순환 만들어

‘그래도 돌봐준 것 아닌가, 오죽하면 그랬겠나’라는 판결문들, ‘학대의 악순환’ 만들어
등록 2020-11-22 11:50 수정 2020-11-24 22:42
‘잠실야구장 노예’로 불렸던 신태원(가명)씨가 2018년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에 응급구조되기 전,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 적환장(주변 쓰레기를 모아두는 곳)에서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제공

‘잠실야구장 노예’로 불렸던 신태원(가명)씨가 2018년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에 응급구조되기 전,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 적환장(주변 쓰레기를 모아두는 곳)에서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제공

2016년부터 약 1년간 경기도 부천시 한 지적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일한 사회복지사 ㄱ씨는 “실장님”으로 불렸다. ‘실장님’의 역할 중 하나는 지시를 잘 따르지 않거나 소란을 피우는 장애인을 제지하는 일이었다. ㄱ씨의 업무는 대개 그들의 머리를, 뺨을, 몸을 수차례 때리는 식으로 이뤄졌다. 존다는 이유로, 정해진 시간이 아닌 때 샤워했다는 이유로, 소변통을 차고 침대에 혼자 올라가려 했다는 이유로, 벽을 두드린다는 이유로, 소리를 질렀다는 이유로, 다른 장애인과 장난쳤다는 이유로, 자리에 앉지 않고 왔다 갔다 했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것…”

어떤 학대는 학대 행위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다. ㄱ씨는 2017년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인천지방법원은 피해자와 그의 가족 상당수가 처벌을 원하지 않고, 일부 피해자는 해당 시설 재입소를 원한다는 점을 감형 근거로 삼았다. 마땅한 거주지도, 자립 기반도 없는 현실이 도리어 피해자를 피해 발생지로 돌아가게 하고 가해자에겐 유리한 정상으로 작용했다. 재판부는 한발 더 나아가 “장애인 보호라는 어려운 업무에 매진하는 사회복지사들의 열악한 근무환경도 참작할 필요가 있다”며 사회복지사로서 더욱 강하게 요구돼야 할 책임의식마저 희석했다.

장애인 학대를 예방하고 피해 장애인을 지원하는 전문기관인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2017∼2019년 장애인 대상 범죄의 형사 판결문 1210개를 전수 분석한 결과, ㄱ씨 사례처럼 “재판부가 집행유예의 주요 참작 사유로 피해자의 ‘처벌불원’(처벌을 원하지 않는다) 의사를 많이 적용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하지만 피해자가 지적장애인인 경우 처벌불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설명했는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보호자와 합의한 것은 아닌지를 함께 검토하는 과정은 대부분 생략됐다. 대신 가해자의 상황이나 노력 등이 판결문에 적혔다. 여러 장애인을 특정해 겁을 준 뒤 휴대전화를 강제로 개통시킨 ㄴ씨에 대해, 2018년 대구지방법원이 “피해자들이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일부 금액만 교부받은 점에 비춰 나름대로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점, ㄴ씨가 생활고로 궁핍했던 점”을 감형 근거로 삼은 것이 그 예다.

착취하기 위해 숙식 제공? 피해자 보호?

때론 ‘숙식과 돌봄 제공’이 학대를 정당화하는 요소가 됐다. 제대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수십 년간 노동력을 착취해도 폭언·폭행이 없었거나 피해자에게 숙식을 제공했다고 가해자 형량을 감경했다. 2018년 광주지방법원은 피해자의 낮은 지적능력 등을 이용해 약 28년 동안 임금을 주지 않고 농사일을 시키고 수년간 피해자의 기초노령연금 등을 횡령한 ㄷ씨가 “약 40년간 숙식을 제공하고 폭행·욕설·감금 등의 행위는 없었다”는 등의 이유로 ㄷ씨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실형(징역 1년6개월)을 집행유예형(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2년)으로 낮췄다. 장애인수당 등을 포함해 피해자로부터 총 1억5천만원이 넘는 거액을 횡령하고 노동력을 착취한 ㄹ씨도 “피해자를 특별히 감금·학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받았다.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은 “경제적 착취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위해를 가했다면 이는 별도 범죄로 판단할 문제다. 위해를 가하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감형 이유로 판단하는 게 합당한지 의문이다. 또 숙식 제공이 피해자를 지속적으로 착취하는 수단으로 삼기 위한 것인지 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피해자 보호 행위’로 단정하는 부분도 동의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특히 학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최소한만의 의식주를 제공한 행위를 두고 수사기관과 법원은 “보호자 역할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피해자의 취약점을 이용한 범죄로 봐야 한다”고 했다.

장애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장애 특성에 대한 이해 부족은 ‘학대의 악순환’을 만든다. 특히 가해자가 부모·배우자·동거인 등 가까운 친족으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재판 과정에서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다면 학대가 반복될 우려가 크다.

‘살해 뒤 자살’ 같은 새로운 인식 생길까

인천지방법원은 2017년 지적장애 3급인 동거인의 머리를 가격한 ㅁ씨에 대해 “동일한 피해자에 대한 재범의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면서도 “가해자 부재로 오히려 피해자가 고통받는 상황에 처하거나 자립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며 벌금형을 선고했다. 배우자 폭행으로 가정보호사건에 송치된 적이 있는 ㅂ씨는 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은 배우자가 요양병원에서 돌아와 함께 살게 되자 다시 배우자에게 폭력을 가해 숨지게 했다.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은 “가해자에게 보호 의무가 있거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의존하는 관계일 때 (법원은) 이를 엄격한 처벌을 위한 양형 요소로 보지 않는다. ‘아주 심각한 인권침해는 아니’라는 등 (가해자의) 행위를 평가하거나 가해자의 어려움을 양형 요소로 열거한 판결이 많았다”고 분석했다.

“‘그래도 돌봐준 것 아닌가. 오죽하면 그랬겠나’라며 가해자의 서사를 판결문에서 확인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장애인 학대를 끊는 일은 요원하다.” 이정민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 팀장이 말한다. 어떤 학대가 ‘학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뿌리엔 결국 “장애인은 누군가 돌봐줘야 하는 불쌍한 사람” “폭행당하는 것도 일반적인 일”이란 시혜적인 시선과 차별적인 인식이 있다. “부모와 자녀의 ‘동반 자살’이 최근 ‘살해 뒤 자살’이란 개념으로 새롭게 인식되는데 장애인 자녀를 부모가 살해한 때도 과연 같은 개념이 적용될까. (부모에게) 훨씬 더 온정적인 시각이 많을 것이다. 판사의 판단이 일반적인 사회 인식을 넘긴 힘들다. (장애인 학대를 엄벌하지 않는 판결문들은) 장애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표지이야기-장애인 학대 판결문 분석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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