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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보호 대신 지원과 조력이 필요하다

어떤 법적 보완이 필요한가
등록 2020-11-22 11:06 수정 2020-11-24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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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19년 2월 지적장애 3급 장애인 ㄱ씨가 신용카드회사와 체결한 이용 계약이 무효라고 판결했다. 낮은 지능지수 등에 비춰볼 때 ㄱ씨가 신용카드 이용 계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의사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편 청주지방법원은 2018년 10월 지적장애 2급 장애인이 제기한 소에 대해 ‘장애등급표’를 근거로 “소송무능력자로 본다”고 판단한 뒤 소 자체를 각하했다.

“지적장애인은 의사능력이 없다”는 논리는 지적장애인을 피해로부터 구제하는 디딤돌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적장애인의 권리 구제 자체를 제한하는 걸림돌로 사용되기도 한다. 피해·권리 구제를 가르는 지렛대인데도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탓이다. 장애등급이 같더라도 재판부에 따라 의사능력 유무를 달리 판단할 때도 있다. 2016년 ㄱ씨와 같은 지적장애 3급 장애인 ㄴ씨가 “고등학교 동창생에게 속아 휴대전화를 개통해 약 200만원의 채무를 지게 됐다”고 주장하며 “의사능력이 없어 휴대전화 개통은 무효”임을 확인해달라는 채무부존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대구지방법원은 “ㄴ씨는 당시 휴대전화 가입신청에 대한 법률적인 이해가 있는 상태였다”고 판단하며 소송을 기각했다.

이처럼 장애인의 의사결정 능력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당사자의 의사를 어디까지 반영하느냐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진다. 보통 장애·노령 등으로 의사결정에 어려움을 겪는 성인은 법적 능력을 제한하고 후견인에게 결정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런 보호는 도리어 사회적 고립과 배제를 낳아 ‘장애 취약성’을 악화할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제3자가 장애인의 결정을 대신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의사결정지원 제도’로 전환할 것을 권고한다. 정보 수집과 분석, 의사결정 과정에서 정보 접근성이 취약한 이들에게 실질적 지원과 조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 이용 계약 과정에서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고, 이 내용을 실제 이해했는지 확인하는 것이 기본이 돼야 한다.

최정규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는 “지적장애인이 금융거래를 할 때 알기 쉬운 용어 등으로 설명하거나 의사소통과 결정을 돕는 조력인을 동반해 계약을 체결하는 절차를 도입해야 한다”며 “금융기관이 이런 절차를 제공하지 않고 계약을 체결했다면 해당 계약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은 “피해 장애인이 진술조력인이나 변호사 도움을 받아 수사와 공판 절차 때 충분한 참여를 보장받는다면 불기소되는 사건 비율을 낮추고 적정한 수준의 처벌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등은 한발 더 나아가 장애인 학대 사건의 특수성을 반영한 ‘장애인 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검사가 피해자 특성에 관한 조사를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 요구할 수 있도록 하거나 전담조사제와 전담재판부 규정을 특례법에 두는 방식이다. 김강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정책국장은 “현행 장애인복지법엔 ‘장애인 학대 범죄’에 대한 정의 규정이 없는데다 가중처벌, 공소시효, 반의사불벌죄 등 관련 형사 절차까지 다루기엔 무리가 있다. 새 유형의 범죄까지 포괄할 수 있는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최근엔 휴대전화 채팅앱을 이용하거나 의약품 임상실험에 동원되는 형태의 장애인 학대 범죄도 늘고 있다. 김 국장은 “미국처럼 금융기관 종사자 등도 신고의무자로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국회에서 특례법 관련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21대 국회에선 범죄 피해 장애인에게 진술조력인을 지원하거나(남인순 의원) 장애인 학대 범죄에 피해자국선변호사제도를 도입하고(송옥주 의원) 관련 범죄자의 취업을 제한하는 등(이종성·강선우 의원)의 내용을 담은 장애인복지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표지이야기-장애인 학대 판결문 분석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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