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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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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과 답] 무능한데 야박하기까지

전례 없는 상황에서 순발력 발휘한 한국과 대비되는 영국 정부의 행정력
등록 2020-11-07 15:12 수정 2020-11-11 00:51
2020년 9월 코로나19 상황에서 개학한 영국 와튼앳스톤의 한 학교. 학생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 교사는 아래가 뚫린 안면 보호 마스크를 썼다. 로이터

2020년 9월 코로나19 상황에서 개학한 영국 와튼앳스톤의 한 학교. 학생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 교사는 아래가 뚫린 안면 보호 마스크를 썼다. 로이터

돌봄과 교육, 지금까지 학교가 한 일은 그것이었다. 팬데믹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그 기능에 큰 차질이 생겼다. 나라마다 고민이 깊다. 아이들을 굶기지 않는 것, 모든 학생이 원격으로라도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딱 이 두 가지만 보면 한국이 영국보다 훨씬 잘했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이게 나라냐”라는 비판이 들불처럼 번졌을 거다.

크리스마스에 먹을 점심 한 끼 밥도 없다니

이게 얼마나 돈이 드는 일이라고 이런 데서 인심을 잃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가을방학 동안 학교 무상급식 대상 어린이들에게 잉글랜드 정부는 점심 제공을 중단했다.

이곳의 무상급식은 저소득 가정 자녀에게만 제공된다. 1월만 해도 140만 명이었는데 팬데믹 이후 100만 명이 더 늘었다. 3월에 전국이 록다운(봉쇄)되고 등교수업이 중단되자, 이 학생들에게는 식료품 꾸러미나 바우처가 제공됐다. 무상급식은 원래 학기 중에만 제공되는데 위기 상황인지라 부활절 방학에도 지원해줬다. 그 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마커스 래슈퍼드 선수가 자신도 무상급식 대상자였다며 방학에도 계속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돕자고 청원한 것에 힘입어 무상급식 지원은 여름방학까지 연장됐다.

그런데 10월 말 가을방학부터 지원이 끊겼다. 이대로라면 겨울방학(크리스마스 휴가) 때도 학교의 점심 지원은 없다. 정부는 이미 다른 복지시스템으로 저소득층을 충분히 지원하고 있으니, 방학 중에 아이들 끼니를 챙기는 건 보호자가 할 일이라고 해명했다. 어린이에게 지속해서 점심을 제공하는 건 학교가 할 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팬데믹 상황에 몸도 마음도 지쳤고 지금까지 우왕좌왕하는 이 정부의 무능함에 극도로 실망한 터라, 무능한데 야박하기까지 한 이들을 비판했다.

가난한 아이들이 추운 겨울,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먹을 한 끼도 챙기지 않는 정부라니! 인터넷에는 풍자 밈(유행 요소를 응용해 만든 사진이나 동영상)이 떠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학교 식당에서 자기 앞에 혼자 쇠고기 정찬을 놓고 앉아 옆에 앉은 어린이에게 묻는다. “너는 아무것도 안 먹니?”

한국과 비교해보자. 일단 출발부터 다르다. 한국에선 대부분 학교가 모든 학생에게 무상급식을 한다. 우리 아이들도 경기도에 있는 한 학교에 다닐 때 늘 따뜻한 점심을 먹었다. 그게 얼마나 좋은 식사였는지 여기 와서 알았다.

한국 학교에선 모든 아이가 양질의 음식을 평등하게 먹는다. 방학 동안에는 지자체가 저소득층 아동에게 점심을 지원한다. 코로나19로 원격수업을 할 때도 그렇게 했다. 시도교육청 결식아동 대상자는 주민센터에서 급식카드나 도시락 배달 지원을 받았다. 한 끼 식사비는 5천~6천원이다. (영국의 무상급식 지원비는 한 끼에 2.3파운드(약 3600원) 정도다. 마음에 이는 이 경쟁심의 정체는 무엇일까.) 물론 한국에도 복지 사각지대가 있다. 그래서 더 촘촘히 챙겨보려는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대통령이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서 굶고 있는 어린이한테 너는 왜 밥을 안 먹냐고 묻는 슬픈 풍자를 돌려 보지는 않는다.

약속한 랩톱의 20%만 도착

학교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공간’이다. 학교 안에선 아이들이 똑같은 크기의 책상을 쓰고, 똑같은 옷을 입고, (한국에선) 똑같은 밥을 먹는다. 학교 시설도 똑같이 이용한다. 학교가 멈추고 다들 자기 집으로 돌아가자, 어찌할 수 없는 불평등이 교육을 막아섰다. 온라인수업만 해도 결국 디지털기기, 통신환경, 독립적인 학습공간, 옆에서 도와주는 어른이 있는지에 따라 그 질이 크게 갈렸다.

10월 말, 각급 학교에는 잉글랜드 교육부가 지원하는 취약계층 학생 대여용 랩톱컴퓨터가 도착했다. 그런데 본래 약속한 수의 20%만 왔다. 기사에 따르면(<가디언> 10월24일치) 북런던에 있는 한 학교는 39개를 신청했는데 8개를 받았고, 블랙풀에 있는 고등학교는 81개를 약속받았는데 16개를 받았다. 에식스주에 있는 학교의 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원래 129개를 신청했는데 26개가 왔어요. 우리 학교는 전교생이 300명인데 그중 4분의 1이 디지털 디바이스(기기)가 없어요. 정부가 자가격리 학생의 온라인수업을 의무화해놓고, 디바이스를 구매하는 경제적 부담을 각 가정에 지우는 일은 부당해요.” 교육부는 더 절실한 지역에 우선 배정했다고 밝혔지만, 취약계층 아동에게 몇 달이 지나도록 노트북컴퓨터 하나 빌려주지 못할 만큼 영국이 그렇게 가난한 나라일까 싶다.

가게는 문을 닫고 학교는 열고

한국 얘기를 해보자. 4월1일 교육부 장관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만나 원격교육 환경 구축에 협조를 구했다. 과기정통부는 이동통신 3사와 협의해, 스마트폰으로 데이터 사용 없이 교육방송(EBS) 등 주요 교육 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교육부는 학교와 시도교육청이 보유한 스마트 기기 23만 대에 더해 5만 대를 추가 구매하고, 기업에서 3만6천 대(삼성 3만 대, LG 6천 대)를 후원받아 이를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빌려줬다.

시도교육청은 저소득층 인터넷 통신비를 월 약 2만원씩 지원하기로 했다. 모든 일은 신속히 이뤄졌다.

1학기가 끝나기 전, 스마트 기기를 빌리기 희망하는 학생 28만3천 명 모두에게 기기가 돌아갔다. 교육용 사이트에 접속하는 모바일 데이터 무상 지원도 완료됐다. 인터넷 통신비는 17만4천 명에게 지급됐다. 더불어 하루에 300만 명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 LMS(학습관리시스템) 플랫폼을 구축했고, 공공 플랫폼 안에 교육 콘텐츠 약 5만 개를 올렸다(교육부, 2020년 8월11일 ‘모든 학생들을 위한 교육 안전망 강화 방안’). 이쯤 되면 “대한민국 만세!”다.

안다. ‘전례 없는’ 상황이다. 각국은 그 사회의 제도, 문화, 인프라, 사람들 의식 등 이미 지닌 경험과 ‘전례’에 기초해서 대처할 수밖에 없다. 케이(K)-방역, 교육복지, 정보기술(IT) 인프라 등 한국이 가진 기반은 생각보다 훌륭하다. 영국은 보편복지 제도가 한국보다 훨씬 발전했지만, 이런 예외적인 순간에 순발력 있게 대처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한참 부족한 것 같다.

사람들의 고통이 깊다. 지금까지 코로나19 확진자는 100만 명이 넘고, 사망자는 4만7천 명에 달하고 신규 확진자가 매일 2만 명이 넘자 영국은 11월5일을 기해 전국을 다시 봉쇄한다고 결정했다. 생필품 가게 외에 모든 상점과 공공시설이 또 문을 닫았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학교 문을 열고 등교수업을 강행했다. 교사노조를 비롯해 반대 청원이 이어졌지만, 이 정부는 ‘학생들의 안녕과 교육이 너무나 중요해서 학교를 중단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 학교 문을 연다고 해도, 돌봄과 교육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건 명백하다. 그렇다고 학교 아닌 다른 곳이 그걸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이곳 상황은 답이 없다.

이스트본(영국)=이향규 <후아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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