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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토크] 처벌로 생명을 보호할 수 없다

등록 2020-10-24 02:20 수정 2020-10-25 01:45

“작은 생명 살해를 막지 않는다면 그게 나라입니까?”

낙태죄 조항을 전면 삭제하는 형법 개정안을 발의한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인터뷰 기사(제1334호 표지이야기) 댓글 중 하나입니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임신중단 여성과 의료진을 처벌하는 현행 낙태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지요. 그런데 현실에서 낙태죄가 생명을 보호하는 역할을 효과적으로 하고 있을까요?

2018년 3월 여성가족부는 헌법재판소에 낸 의견서를 통해 “현행 낙태죄는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으로 임신중절 건수를 줄이고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입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2011년 보건복지부가 연세대에 의뢰해 전국 만 15~44살 여성 4천 명을 조사한 결과, 2010년 기준 연간 약 17만 건의 임신중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면 2006~2013년 여성이 임신중단을 사유로 기소된 경우는 연간 10건 이하에 그쳤습니다.

2018년 시행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를 보면 임신중절 추정 건수(2017년 약 5만 건)는 해마다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이 흐름은 피임 증가, 남아 선호 사상 약화, 경제적 여건 개선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임신중단을 형벌로 금지하는 낙태죄가 이 추세에 영향을 미쳤다는 근거는 찾기 어렵습니다. 2017년 9월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 연구단체 거트마커연구소가 의학전문지 <랜싯>에 발표한 연구결과를 보면, 임신중단을 더 폭넓게 허용하는 북유럽·북아메리카 지역에선 임신중단이 더 안전하게 이뤄질 뿐만 아니라 그 건수도 적습니다. 1988년 이후 임신중단을 ‘비범죄화’한 캐나다에선 임신중단 건수가 되레 감소하고요.

임신중단을 줄이려면 일차적으로 원하지 않는 임신을 예방해야 합니다. 2018년 만 15~44살 여성 약 1만 명에게 인공임신중절 실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피임 지식·정보를 주로 인터넷 등 언론매체(72.5%)에서 얻고 있었습니다. 남성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피임 방식으로 콘돔(74.2%)이 가장 많았으나 질외사정법(42.6%)·월경주기법(23.1%) 같은 불완전한 방법으로 피임하는 비율도 여전히 높습니다. 피임법을 비롯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살피고 사회적 관계 맺기 방법을 일러주는 제대로 된 성교육이 학교에서 이뤄져야 함을 보여주는 통계입니다. 임신중단 사유로는 ‘학업·직장 등 사회활동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33.4%), ‘경제 사정상 양육이 힘들어서’(32.9%) 등 경제·사회적 요인이 많습니다.

남녀 모두에게 피임법이나 임신·출산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자녀 출산과 양육이 어려운 현실 문제도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서 ‘처벌’에 기대려는 나라에서 소중한 생명 보호가 가능할까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부터 줄기차게 이어진 ‘낙태죄 찬반 논쟁’에서 벗어나, 여성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표지이야기-임신중단 정부안 반대, 4개의 시선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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