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노 땡큐] 살처분

등록 2020-10-17 07:39 수정 2020-11-07 07:55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어떤 지역에 치명적인 전염병에 걸린 환자가 발생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병을 옮길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인근지역 38만 963명을 땅에 묻어버리면 어떨까? 병을 예방하기 위해 국가공권력을 동원해 대규모 학살을 벌여보자. 미친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물론 인간은 아닌 돼지다.

2019년 가을,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발생해 38만 963마리가 살처분됐다. 포크레인에 실려가는 돼지, 땅속에 산 채로 묻혀 비명을 지르는 돼지, 파묻힌 흙을 파내고 탈출하려는 돼지의 모습을 보면서 육고기를 끊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다시 발생했고, 이미 2244마리가 살처분됐다.

이번만은 아니다. 2010년엔 구제역으로 무려 돼지 350만 마리가 학살당했다. 2003년부터 2018년까지 조류인플루엔자로 살처분된 닭과 오리는 9400만 마리다. 병에 걸린 동물만 죽인 게 아니라 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동물을 죽였다.

동물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감염병

인간이나 동물이나 감염병이 걸리는 원인은 같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의 감염 경로는 돼지의 침과 사료, 분뇨 등을 통해서다. 좁은 닭장과 비위생적인 우리에서 사육당하는 동물은 서로의 침과 오물을 통해 무서운 속도로 병을 옮긴다. 감염된 돼지의 고기가 들어간 음식물 찌꺼기나 잔반을 재가공한 사료를 돼지에게 먹여도 감염된다. 오로지 값싼 고기를 싼값에 대량생산해 팔아 이윤을 얻고, 값싼 고기를 대량으로 먹기 위해 지은 동물공장이 만든 끔찍한 결과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닭과 고기를 생산하는 곳에서 감염병도 대량생산된다. 이 문제를 외면한 채 당장 눈앞의 바이러스와 동물을 묻어버린다고 감염병이 예방되지 않는다. 올해 묻은 바이러스가 내년에 다시 찾아올 것이다.

살처분은 인간에게도 해롭다. 대한민국은 땅덩어리가 좁다. 수십만 마리를 한꺼번에 묻을 땅이 없다. 돼지 사체를 품은 토양은 죽은 땅이 된다. 지하수 오염, 해충 증식 등으로 새로운 문제가 일어난다. 실제 2019년 11월 살처분해 쌓아둔 돼지 사체 4만7천 구의 피가 비 때문에 경기도 연천군 하천으로 흘러 강이 붉게 물들었다. 살처분에 투입되는 공무원, 이주노동자, 군 장병 등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린다. 살아 있는 생명의 비명을 들으면서 제정신을 유지할 사람은 몇 없다.

코로나19라는 대재앙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인간이 살아온 환경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되돌아본다. 콜센터 노동자와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의 집단감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이들의 노동현장을 ‘닭장’ 또는 ‘돼지우리’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닭장과 돼지우리에서는 감염병이 유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동물의 감염병을 예방하는 방법도 코로나19 예방과 같다. 사람과 사람의 밀접 접촉을 피하고, 재택근무를 하고, 아프면 깨끗한 집에서 쉰다. 손을 자주 씻고 개인 위생을 철저히 하며,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음식점과 건물에는 정기 소독을 한다.

인간에게 남겨진 선택지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기본 수칙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호흡기 질환이 2019년과 비교해 35% 줄었다고 한다. 인간의 거리 두기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거리 두기가 가능하다면 감염병을 예방할 수 있다. 동물을 없애 거리를 확보할지, 공장식 축산 제도를 개선해 거리를 확보할지의 선택지만 있을 뿐이다. 소름 돋는 사실은 이 선택지가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 위기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 아무런 사회안전망 없이 방치된 사람들과 살처분당하는 동물의 운명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인류가 코로나19 이후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면 이 운명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하길 바란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