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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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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전태일] 노래와 연주는 노동이 아니다?

곡 쓰고 노래하는 박수민씨, 베이시스트 민연주씨… 정부 지원 받으려니 ‘산 넘어 산’
등록 2020-10-17 07:03 수정 2020-10-27 07:24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22살 청년은 불타는 몸으로 절규했다.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도록 법 11조를 개정하라.” “모든 노동자에게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동조합법 2조를 개정하라.” “모든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하라.”
50년이 지난 2020년 가을, 민주노총과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는 22살 청년의 이름을 다시 부르짖는다. ‘전태일 3법’을 만들자고 국회를 압박한다. 왜, 다시 전태일일까. “50년 전 전태일 노동자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지만 일터는 달라지지 않았”(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기 때문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의 마지막 절규에 한국 사회는 여전히 시원스레 답하지 못한다.
노회찬재단은 올해 ‘투명 노동자’에 주목하는 ‘6411프로젝트’(제1323호 참조)를 진행 중이다. ‘6411’의 연장선으로 노회찬재단은 ‘2020년 전태일들’의 목소리를 듣는 프로젝트를 9월 한 달 동안 진행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와 이철 작가가 일터·나이·성별은 각각 달라도 전태일과 ‘닮은 얼굴’을 한 8명을 전국 곳곳에서 만났다.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흔들리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르포와 일기 등의 형식으로 기록했다. <한겨레21>은 전태일 50주기를 한 달 앞둔 10월 매주 이들의 기록을 전한다._편집자주

*‘2020 전태일의 일기’ 도움 주신 분들
강언주(부산 에너지정의행동) 권순대(경희대학교) 박미경(전태일재단) 박상희(원전 노동자) 박정훈(라이더유니온) 솔가(뮤지션유니온) 안연정(청년허브) 오승은(공공운수노조) 오진아(소셜디자이너Doing) 이자스민(전 국회의원) 이정기(봉제인노조) 홍진아(빌라션사인)

박수민(가명)씨는 음악이 일이다. 곡을 쓰고 기타 치며 노래하는 것, 음반을 만들고 무대에 오르는 것이 그의 일이다. 모든 곡은 저마다 제 그림이 있어 연주자와 합주하면서 그것을 잡아낸다. 마디마다 적절한 호흡을 찾는 과정이다. 합을 맞춰야 곡이 완성된다. 음향을 점검하는 일도 중요하다. 소리 하나하나를 잘 다듬어야 준비한 것이 제대로 드러난다. 엔지니어가 소리도 잘 만지고 곡도 잘 이해한다면 완성도는 올라간다. 곡을 쓰고 노래하는 것뿐 아니라 연주자 섭외, 공간 대관, 합주와 녹음, 일정 조정 등은 그에겐 일이다. 음원 등록, 시디 제작, 음반과 공연 홍보도 마찬가지다. 이 일을 한 지 20년이 넘었다.

“음악이 일인 게 저한텐 너무나 당연한데 다른 분들은 이 말이 와닿지 않을 수 있죠. 묻고 싶어요. 음악도 일이다, 이 말을 들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세요?”

정부 지원 받으려 ‘가난 증명’도 쉽잖아

벌써 7년이 흘렀다. 음악이 일인 사람들이 모여 뮤지션유니온을 결성했다. 서울 홍익대 앞 인디신의 활동이 눈에 띄게 위축되던 시기였고, 사회가 예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의 생활을 고민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죄송해서 몇 번을 망설였는데…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 (…) 2월 중하순에는 밀린 돈들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 항상 도와주셔서 정말 면목 없고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생활고와 지병으로 세상을 등진 한 시나리오작가가 이웃집에 남긴 쪽지, 이것이 세상에 알려진 지 2년이 지났을 때다.

“다른 일을 하는 분들은 음악을 노동으로 이해하기가 힘든가봐요.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냐는 거죠. 맞아요. 좋으니까 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좋아서 한다고 일이 취미가 되는 건 아니에요.”

민연주(가명)씨는 베이스기타를 연주한다. 30년 동안 한 일이다. 올해 코로나19는 무대를 앗았고 그는 일할 자리를 찾지 못했다. 정부는 여러 지원사업을 마련했지만 그것을 신청하는 과정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음악으로써 자신을 증명했다. 가까운 동료의 부탁으로 얼마를 받고 무대에 올랐고, 또 그런 부탁으로 음반을 프로듀싱하고 곡을 편곡했다. 그도 동료에게 여러 일을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의 비용을 건넸다. 섭섭하지 않게 하려고 애썼지만 개인 사이에 오간 일과 비용의 대부분은 서류에 남지 않았다.

이 바닥은 그렇게 굴러갔다. 그래서 행정 절차에 따라 자기 일을 증명하는 것이 그에겐 익숙지 않았다. 지원사업에 신청하려면 먼저 예술인이라는 자격을 얻어야 했다. 리플릿(전단), 포스터, 프로그램북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야 했다. 공연 녹화 영상이 있어도 포스터에 이름이 실리지 않으면 그것은 증빙 자료가 될 수 없었다. 내 일과 행적은 엄연한 것이었으나 그건 나를 증명할 방편이 아니었다. 창작준비금 지원사업은 연간 1만2천 명을 지원하는 규모였고, 2018년 예술인 실태 조사에 따르면 예술인 수는 17만8천여 명이었다.

‘아이돌 대박’ 그림자에 가려진 노동

고용안정지원금을 살펴보기도 했다. 기관이나 학원에서 음악 강사로 일했어야 지원 대상이 될 수 있다. 베이스기타 ‘레슨’도 여러 차례 했지만, 소득을 국가에 신고하는 일에 신경 쓰지 못했다. 근로장려금도 찾아봤다. 국세청에 신고된 소득이 너무 적었고 그만큼 증명할 만한 ‘근로’도 적었다. 모든 시도와 과정은 마음을 힘들게 했고 무엇보다 스스로 지원이 절실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일이 괴로웠다.

“90년대 초반부터 활동했어요. 자유를 외치던 시절이었어요. 그간 우리 사회가 많은 걸 얻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거 같아요. 저는 상업음악을 해요. 대중적인 음악이요. 그래서 이 틀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위에서 일하는 비즈니스맨들이 있고 우리는 거기서 연주하거나 곡을 만들죠. 오히려 비즈니스는 몇몇 사람이 하던 일에서 큰 기업이 하는 일로 바뀌었지만요.”

1990년대 후반 홍익대 앞 클럽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여러 뮤지션은 새로운 꿈을 꿨다. 대형 기획사에 기대지 않고 그들 자신이 중심이 되어 음악을 생산하고 대중과 직접 소통하겠다는 꿈이었다. ‘인디밴드’ ‘인디레이블’ ‘인디신’은 그 시절 대중 앞에 등장한 새로운 용어이자 새로운 세계를 향한 의지였다. 하지만 불법 다운로드가 판을 쳤다. 음악을 듣는 일에 돈을 내는 사람은 소수였다. 거대한 팬덤이 떠받쳐주지 않는 한 음악 생산을 이어갈 방법이 없었다. 대중음악 산업은 아이돌이 중심이 됐다.

다양한 캐릭터와 화려한 볼거리로 무장한 아이돌 그룹의 수익은 음원 판매에 그치지 않았다. 드라마와 영화 출연, 행사 참석, 광고 촬영 등 다양한 형태로 활동을 넓혀갔다. 아이돌은 엠넷 등 영향력 있는 매체와 협업하며 해외로까지 시장을 확장하는 일에 앞장섰다. 어린아이 모습 그대로 데뷔해 청장년까지 성장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상품이 되었다. 인디밴드는 이 시장에서 하나의 ‘콘셉트’일 뿐이었다. 기획사는 기업이 되었고, 음원 시장은 벅스와 멜론 등 스트리밍(실시간 재생) 서비스 업체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이 시장이 책정한 음원 단가는 곡당 7.4원이다(멜론 스트리밍 정액제, 2019년 기준).

“클럽을 대표하는 밴드들이 있었어요. 그때는 공연 끝나면 클럽에서 나와 여러 밴드가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들 어디서 뭘 하는지 몰라요.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래하고 연주하던 사람들이 다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코로나19로 비용은 늘고 수익은 줄어

10월10일 뮤유페스타(MU Festa)가 열렸다. 오랜만의 무대였다. 뮤지션유니온이 기획하고 서울시가 비용을 지원했다. 신촌문화발전소 등 공연장은 무대를 제공하고 영상 촬영을 지원하는 것으로 뜻을 함께했다. 객석을 절반으로 줄이고 유튜브로 현장을 중계한 공연이었다. 객석을 줄인 만큼 수익은 적어졌고 영상 촬영과 송출 등으로 비용은 늘었다. 이들의 음악은 좀더 어려운 상황을 마주했다. 하지만 무대는 뮤지션이 ‘일상’을 꾸려가는 세계이고 무대는 그들이 삶을 꾸려갈 ‘활력’을 얻는 근간이다.

“왜 노동조합이냐고요? 7년 전에 처음 모였을 때 우리 일이 노동이라는 말이 가슴에 확 와닿았어요. 하지만 그 뒤 고민이 시작됐죠. 많은 사람이 음악은 노동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려요. 조합원 가운데 노동자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걸 원치 않는 사람도 있죠. 하지만 우리 일이 노동인 것은 분명해요.”

이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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