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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안 발의 이유? “죄의식 문화 깨뜨리자”

시선4 국회의원- 낙태죄 완전 폐지를 핵심으로 한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한 권인숙 의원
등록 2020-10-17 06:31 수정 2020-10-19 01:21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임신중단 여성과 의료진을 처벌하는 형법의 ‘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강화하는 법 정비에 나섰어야 할 국회는, 지난 1년6개월 동안 그 책임을 외면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안전성을 검증한 유산 유도약 ‘미프진’을 도입하기 위한 입법 논의조차 미뤄지면서, 임신중단을 결정한 여성들은 여전히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 놓였다. 정부는 낙태죄 효력 유지 기한인 2020년 12월31일이 석 달도 채 남지 않은 10월7일에야 처벌 조항을 유지하되 임신중단 허용 범위를 넓히는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정부안)을 입법예고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 권인숙(56) 의원은 정부안을 비판하는 한편, 10월12일 낙태죄 완전 폐지를 핵심으로 한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피해 생존자이자 여성학자인 그는 21대 국회에 비례대표로 들어오면서, 아동·청소년을 성적으로 유인하는 ‘온라인 그루밍’과 ‘낙태죄 폐지’를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주변에 말해왔다. 10월14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의원회관에서 권인숙 의원을 만나 그 까닭을 물었다.

보편적이지만 여성에게 죄를 씌우는

특별히 낙태죄 문제에 관심 가진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사실 임신중단이 일상적으로 벌어지지만, 주변 친구를 비롯해 많은 여성이 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에 강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1960~70년대 가족계획 정책에서 ‘낙태’는 주요 피임 수단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여러 차례 임신중단을 할 만큼 보편적이었으나, 점점 더 죄의식을 강화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실상 사문화된 처벌 조항까지 유지되고 있다. 성폭력 피해처럼 여성에게 원인을 돌리고 책임을 묻는 ‘죄의식 문화’는 정신 건강과 삶의 주체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발의안을 보니 형법에서 낙태죄를 완전히 삭제하고 모자보건법에 임신·출산, 인공임신중절 등 보건의료 정보와 서비스 제공에 대한 국가 책무를 명시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가 필요하다고 본 건가.

“캐나다는 1988년 낙태금지법 위헌 선고 이후 처벌 규정이 없어졌지만, 전체 임신중단 건수는 늘지 않았다. 초기 임신중단이 활성화하면서 임신 20주 이후 임신중단이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고민하는 여성은 상담받을 수 있는데 강제적인 상담이 아니다. ‘낙태는 범죄’라는 틀을 유지하는 사회와 여성에게 결정권을 주고 건강을 보호하는 사회의 문제 접근 방식은 아예 다르다.”

국회 여성가족위 여당 간사이기도 하다. 이런 의견을 정부 논의 과정에 공식적으로 전달한 적은 없나.

“헌재 결정 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으로 일할 때, 여성가족부와 함께 (모자보건법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를 불러 이야기하긴 했다. 그동안 경험상 복지부는 기계적인 균형을 내세워 여성이 임신·임신중단 주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 적이 없는 것 같다. 7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만나 의견을 나눠보니 비범죄화 추진 의지가 있었다. 추 장관의 노력이 정부안에 조금은 들어간 부분이 있지만 종합적으로 다양한 의견이 반영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21대 국회 여성 의원 19%의 한계

2019년 헌재 결정이 나고 나흘 뒤, 이정미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 외에 20·21대 국회에서 낙태죄 개정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권 의원은 “정부와 국회가 낙태죄 문제를 말하기 조심스러운 ‘뜨거운 감자’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낙태죄 논란은 실제 이해 당사자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갈등으로 보기 어렵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얼마나 실재하는지 알 수 없는 가치를 대변하는 종교계를 너무나 크게 생각하면서 여성 당사자의 삶과 의견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낙태죄에 손대는 것에 지레 겁먹고 현실에 기반을 둔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고 논의하는 과정이 부족하다는 분석이다.

2017년 촛불로 정권이 바뀌고 그해 10월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에 대한 청와대 국민청원에 23만여 명이 동의했다. 이듬해엔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가 이어졌지만, 정부와 정치권이 이러한 변화 촉구를 제때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불법촬영 같은 디지털성폭력에 어떤 식으로 노출돼 피해가 확산하고 있는지, 그 두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현실을 아는 사람이 국회에 많지 않다. 21대 국회 여성의원 비율도 19%에 그쳐 여성들의 목소리가 국회에 잘 전달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법안 공동 발의 의원이 모두 여성이다. (더불어민주당 양이원영·유정주·윤미향·이수진(비례)·정춘숙 의원, 정의당 류호정·심상정·이은주·장혜영 의원,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

“발의를 서둘러야 했던 상황이라 짧은 시간에 의사결정이 가능한 의원실을 골라 법안을 보냈다. 전체 의원에게 법안을 돌린 건 아니다.”

현실적으로 헌재가 요구한 시한까지 낙태죄 전면 폐지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있을까. 여당 의석이 과반이지만 낙태죄 폐지 여부에 대해 당론을 정하지 않기로 했고, 종교계와 보수단체의 반발도 크다.

“같은 당 박주민 의원도 형법에서 낙태죄를 삭제하는 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니,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정부안 문제를 정리할 힘이 더 생길 수 있다고 본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형법의 낙태죄 폐지에 대해 전향적 태도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여전히 있다.”

쏟아지는 비난 메시지

인터뷰가 진행된 10월14일 오전, 권인숙 의원의 휴대전화는 연신 진동음을 냈다. 낙태죄 완전 폐지 법안 발의를 비난하는 문자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같은 여성으로서 발의하신 법을 보고 충격받았습니다. 낙태를 전면 허용하면 여성들이 그 피해를 받게 됩니다. 어떤 남성이 피임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러한 유권자 반응을 아예 외면하긴 어렵지 않을까. “저는 비례대표로서 (인권과 성평등 강화 뜻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어떻게든 성관계가 이뤄지는 현실에서, 특히 젊은 여성들의 성적 욕구와 행위를 금하고 자신의 몸을 책임질 수 있도록 정보 제공이나 피임 교육도 하지 않으면서 그 결과물에 죄의식을 갖게 하는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국회에선 낙태죄 완전 삭제안을 놓고 찬반 논쟁이 있었다. 낙태죄 찬성론자는 태아 생명 존중, 성도덕 유지, 간통죄 입법에 따른 균형 유지 등을 근거로 내세웠다. 전쟁 이후 열악한 사회경제적 여건에서 출산을 강제하는 건 여성의 고통과 위험을 가중할 뿐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낙태죄 조항이 들어간 대한민국 최초 형법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67년이 지난 2020년 국회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참고 문헌: ‘해방 이후 우리나라 낙태의 실태와 과제’(전효숙·서홍관, 2003)

*표지이야기-임신중단 정부안 반대, 4개의 시선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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