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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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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차별이 감염병을 더 위험하게 한다

등록 2020-09-21 12:46 수정 2020-09-23 01:46
2020년 3월7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가 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정부에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중국인 입국 금지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0년 3월7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가 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정부에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중국인 입국 금지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 감염이 시작되던 2020년 초, 사람들은 중국인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일부 상점에서 중국인을 거부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일부 종교에선 이 감염병이 종교를 탄압한 중국에 내리는 신의 심판이라고도 했다. 이후 다른 지역과 다른 집단으로 코로나19가 퍼지면서, 해당 지역이나 집단으로 비난이 향했다. 건강 걱정이 아닌 공포와 저주가 섞인 말이 돌았다. 신천지 교인, 대구·경북 지역 주민, 동성애자 등이 그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이 지닌 편견이 쏟아졌다. 방역 지침을 따르지 않은 개인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이와 무관하게 해당 집단 전체에 적개심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감염병 자체에 대한 공포와 함께 종교, 지역, 연령, 성적 지향, 출신국가, 인종 등에 따라 특정 집단에 품고 있던 편견이 방출되는 듯 보였다.

바이러스와 낙인의 공포

최근에는 일부 교회를 중심으로 코로나19가 퍼지면서 개신교인을 향한 비난의 말이 거세게 등장했다. 방역을 고의로 방해한 일부 개인과 단체의 책임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이와 무관하게 기독교인 전반에 대한 거부감도 보였다.

바이러스의 다음 행보가 어디가 될지 숨죽여 보게 된다. 잠재된 수많은 집단적 편견 중 무엇이 방출될지 모르니 두렵다. 혹시 내가 생활하는 동네, 직장, 모임에 편견이 부착될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지금 바이러스와 싸우며, 동시에 내가 소속된 집단이 낙인의 대상이 되진 않을지 걱정하는 불안과도 싸우고 있다.

특정 집단에서 어떤 감염이 많이 발생한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이유가, 바이러스가 의도적으로 그 집단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신의 형벌이라는 식의 설명은 중세시대 마녀사냥에 쓰인 비과학적 사고일 뿐이다. 더 합리적인 설명은, 바이러스가 사람을 가리지는 않지만, 우리 삶이 어떤 관계로 구성됐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바이러스가 사람의 연결망을 타고 전파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울리는 재난문자를 통해 코로나19 확진 양상을 보면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의 사회적 연결망을 엿보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삶의 중심이 되어 생활하고, 어떤 사람은 이웃으로 같은 동네에서 스치며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흩어져 살지만 성소수자 친화적인 공간에서 모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시설 안에서 다른 이와 접촉하지 못하며 산다는 것을 알았다.

바이러스가 드러내는 사회적 연결망

바이러스는 그 관계의 성격도 드러낸다. 코로나19는 호흡기로 감염되므로, 사람들이 어떤 장소에서 누구와 대화했는지 사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와 같이 성적 접촉으로 감염되는 질병은 더욱 은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1981년 미국에서 에이즈가 처음 남성 동성애자에게서 발견됐는데, 이 사실은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란 것이 아니라 동성 간 사적인 관계가 바이러스를 통해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바이러스 전파로 우리의 관계망이 노출되면서, 이렇게 동성애처럼 사회적으로 편견이 있는 관계나 소속이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밝히고 싶지 않았던 직업이나 정체성이 감염병을 통해 보일 수 있다. 해당 직업이나 정체성에 아무런 낙인이 없다면 치료에 집중하면 될 일이지만, 낙인이 있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낙인으로 인한 부정적인 시선과 대우를 감당해야 하고, 더는 이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기도 하다. 차별이 병을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조건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감염병 퇴치 지침으로 일관되게 ‘차별금지’를 역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염 사실이 드러날 경우 부당한 차별을 받을 것이 뻔하다면, 감염병 검사를 받고 치료받을 용기를 내기 어렵다. 감염이 발생한 집단에 소속됐거나 그렇게 오해받아 차별받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사회의 차별이 사람들을 더욱 숨게 하고,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건강을 해친다.

감염병에 낙인이 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대표적인 예가 에이즈다. 이미 에이즈 치료제가 나온 지 한참 됐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걸리면 죽는 병’이라 생각하고 끔찍한 이미지를 상상한다. 에이즈의 원인인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가 침이나 일반적인 접촉으로 감염되지 않는다고 밝혀졌음에도 감염인이 옆에 있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여기에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동성애자를 차별해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1992년 유엔 자유권위원회에 제기됐던 ‘투넨 대 오스트레일리아’(Toonen v. Australia) 사건은 바로 이 질문, ‘에이즈를 이유로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것이 타당한가’의 쟁점을 다루었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주 형법에서는 동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고 있었다. 태즈메이니아 주정부는 에이즈 확산 예방을 위해 이 조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유엔 자유권위원회는 당시 보건의학적 증거에 바탕을 두어 정부 주장을 기각했다.

2019년 6월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서울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이 성소수자 인권을 상징하는 여섯 빛깔 무지개색 대형 천을 펼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2019년 6월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서울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이 성소수자 인권을 상징하는 여섯 빛깔 무지개색 대형 천을 펼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차별금지법, 감염 예방에도 도움

유엔 자유권위원회는 정부 주장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했다. 이 처벌 조항 때문에 동성애자가 더욱 비가시화되고 에이즈 감염 위험이 높아져, 오히려 입법 의도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동성 간 성행위는 사생활 영역으로서, 이를 이유로 처벌하는 것은 국가의 부당한 간섭이라고 보았다. 즉, 동성 간 성행위 처벌은 사생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자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로서 자유권 규약에 위배된다고 결정(1994년 3월)했다.

유엔 자유권위원회의 결정이 있은 지 벌써 26년 남짓 지났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에이즈에 관한 이해는 당시 수준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는 2020년 현재에도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라며 유엔 자유권위원회의 결정과 정반대로 동성애자를 차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성애 혹은 동성 간 성행위를 정죄하고 차별해야 에이즈 감염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로 차별금지법을 줄곧 반대했다.

보수 기독교 단체의 활동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 이상이기도 했다. 동성애라는 낯선 관계, 에이즈라는 공포스러운 질병, 그리고 감염 경로로서 성적 접촉이라는 특수성의 삼각 구도를 이용해,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관해 불쾌감을 자극하는 이미지와 영상을 제작하고 유포했다. 이를 통해 동성애자와 HIV 감염인에 대해 더럽고 ‘동물적’이라는 편견을 만들었고, 그렇게 적극적으로 성소수자 차별을 확산했다.

병에 대한 공포가 편견과 증오로

이미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 미국과 캐나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다수의 라틴아메리카 국가, 가까운 대만 등에서 동성결혼을 인정하고 실재하는 커플들과 어울려 사는 지금, 한국에서는 아직도 동성애자는 더럽고 ‘동물적’이며 공중보건에 해롭다는 비과학적인 편견과 싸우고 있다. 이미 수많은 동성애자가 주변에 가족·친구·동료로 함께 생활하는데도, 내 곁의 소중한 사람으로서 이들의 실체를 보지 않고 허상의 편견을 좇고 있다.

앞선 차별금지법 연재에서 다루었듯,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누구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헌법과 국제인권법이 보장하는 불가침의 권리다. 헌법재판소가 평등권을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라고 말할 정도로, 평등 및 차별금지는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는 기본원리며, 모든 자유와 권리를 가로지르는 기본권이다. 이런 중요한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법률이, 비이성적인 혐오와 편견 때문에 제정되지 못하는 현상이 계속됐다.

병에 대한 공포는 사람을 잔인하게 한다. 자신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병에 걸린 타인에 대한 비난과 배척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병균으로 인식되는 순간 생명에 대한 존중감이 사라진다. 감염인을 가치 없게 여기고 심지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 병이 신의 벌이라고 생각한다면 고통받는 게 마땅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정당화하며 무감하게 되는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동성애와 에이즈를 결합한 공포를 자극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했던 그간의 주장이,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비인간적인 구호였는지를 다시금 통감한다. 정말 건강이 목적이라면 차별은 없어야 하고 상대의 쾌유를 바라야 한다. 그렇지 않고 병이 주는 공포에 압도되거나 그 공포를 이용해 어떤 집단을 병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천벌로 정죄한다면, 흑사병의 원인을 유대인으로 지목해 살인을 자행하게 했던 증오의 역사를 되풀이할 뿐이다.

우리 모두가 소중한 존재

아직 치료제도 백신도 개발되지 않은 코로나19와 싸우는 이 순간, 그럼에도 우리가 인간성을 유지하며 함께 이 시간을 버틸 수 있으면 좋겠다. 이 힘겨운 시간을 통해 그래도 배우는 것이 있다면, 결국 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고 당신의 건강이 내 건강이 된다는 깨달음이다. 신의 섭리가 있다면 이렇게 타인을 살피는 따뜻한 마음과 우리가 모두 똑같이 소중한 인간이라는 평등의 정신에 있지 않을까 싶다.

차별금지법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모두 평등한 존재로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충실하게 행동하자는 약속일 뿐이다. 특정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구도 불합리하게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 보편적 원칙이 언젠가 나를 보호할 것이라는 사실 하나로,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은 충분히 설명된다. 이제 차별금지법(평등법)을 제정하자.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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