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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없으면 언론은 그냥 ‘일기’

기성 언론에는 없지만 뉴미디어 언론엔 있는 것
등록 2020-09-05 12:49 수정 2020-09-10 01:27
2020년 2월19일 영화 <기생충>의 기자간담회가 열린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의 회의장에서 여러 언론사 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20년 2월19일 영화 <기생충>의 기자간담회가 열린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의 회의장에서 여러 언론사 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야구는 공놀이다. 투수가 공을 던지면 타자가 치는 ‘한낱’ 공놀이. 그런데 프로야구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선수들은 억대 연봉을 받고 경기는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화려한 이벤트가 된다.

‘한낱 공놀이’를 ‘화려한 이벤트’로 바꿔놓는 마술의 비결은 관중의 존재에 있다. 키움 히어로즈의 이정후 선수가 핵심을 짚었다. “팬이 없으면 선수들은 그냥 공놀이를 할 뿐”이라고. 아무리 뛰어난 기량을 가진 야구선수들이 아름다운 플레이를 펼쳐도 그 자체로는 어떤 부가가치도 창출할 수 없다. 지켜보는 관중이 있기에 공놀이에 의미가 부여되고 산업이 만들어진다. 관중이 없다면 프로야구는 없다.

사인해주지 않는 프로야구 선수

언론 얘기를 하는데 다짜고짜 왜 야구 타령인가? 프로야구와 언론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언론도 독자와 시청자가 없으면 한낱 ‘글놀이’나 ‘말놀이’에 불과하다는 것. 수용자가 없다면 언론도 존재할 의미를 잃는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언론 역시 스스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누군가 읽어주거나 봐주지 않으면 저널리즘은 혼자 일기장에 끼적인 글과 무엇이 다를까(영어 ‘journal’에는 ‘일기’라는 뜻도 있다). 기자에게 월급은 누가 주며 뉴스 산업이란 것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언론 자유가 주어지고 권력의 감시자라는 숭고한 위상이 가능해진 것도 수용자 시민들의 존재 덕분이다. 언론에 부여된 모든 권한은 생업에 바쁜 주권자를 대신해 정보를 수집하고 선출된 권력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대가로 주어진 반대급부다.

그러나 오랫동안 언론인에게 수용자의 중요성이 간과돼왔다. 구독률과 시청률이라는 숫자를 다루는 때 외에 독자나 시청자를 염두에 두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우리가 알아서 만들 테니 너희는 조용히 보기만 해라.’ 수용자는 언론이 이런 속내로 자신을 푸대접한다고 느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이따금 팬에게 사인해주지 않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도마 위에 오른다. 언론도 스타들의 불성실한 팬서비스를 준엄하게 꾸짖는다. 그러나 정작 자신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은 보지 못한다. 자신을 안중에 두지 않는 언론을 보는 수용자의 심정은 안하무인의 야구 스타를 보는 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기자에게 뉴스란 ‘안 나온 이야기’

기성 언론에 불만을 가진 수용자는 뉴미디어에 기반을 둔 새로운 언론으로 옮겨가고 있다. 진보 성향 40~50대 중년층은 팟캐스트에, 보수 성향 60대 이상 노년층은 극우 유튜브 채널로 빠져나간다. 미래의 뉴스 소비층인 20~30대 젊은 세대는 ‘뉴닉’ ‘닷페이스’ ‘퍼블리’ 등 새로운 유형의 미디어 스타트업으로 몰려가고 있다. 전통 언론의 구독률과 매출액은 가파르게 떨어지는데, 이들의 구독자나 후원자는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비결이 뭘까? ‘기성 언론에는 없지만 뉴미디어 언론엔 있는 것’은 수용자 중심 사고다. 공급자 중심의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전통 언론과 달리 수용자의 눈높이와 관심사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대다수 젊은 수용자에게 뉴스는 어렵다. 화제가 된 이슈를 뒤늦게 알아보려 기사를 찾아 읽어도 이미 많이 진행된 이슈의 맥락을 친절히 설명해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계속 이슈를 추적해왔기에 전말을 잘 아는 기자의 눈높이가 반영된 것이다. 수용자는 뉴스를 볼 때 ‘나에게 유익한 이야기’인지를 중요시하지만, 기자에게 뉴스란 오로지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이야기’다. 오늘의 뉴스에서 어제의 뉴스, 즉 ‘이미 나왔던 이야기’는 다 아는 내용이라는 전제 아래 대폭 생략된다.

그러나 바쁜 수용자는 뉴스를 매일 챙겨 보지 않으며, 특별히 관심이 있지 않는 한 특정 분야 뉴스를 계속 따라가지도 않는다. 수용자에겐 어제 나온 이야기라 해서 오늘 쓸모가 없거나 뉴스로서 값어치가 없는 게 아니다. 전통 언론은 이런 수용자의 당연한 사정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늘 이렇게 해왔다’는 당연하지 않은 이유로 애써 외면해왔다.

수용자에게 별 의미를 갖지 않는 ‘단독’에 집착하는 것도 공급자 중심 사고를 잘 보여주는 예다. 기자들은 단독 기사에 더 많은 뉴스 가치를 부여하고 단독을 위해 취재 윤리나 실정법을 위반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단독 싸움은 순전히 공급자들끼리의 경쟁일 뿐, 수용자는 누가 어떤 단독을 했는지 관심도 없고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전통 언론과 수용자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종이에 대한 집착에서도 드러난다. 기자들은 지금도 종이신문의 유산인 ‘1면’ ‘사회면 톱’ 같은 말을 즐겨 쓴다. 아직도 많은 언론사가 인쇄면 편집을 기준으로 아이템의 비중과 기사 스타일을 결정한다(<한겨레21>도 그렇다!). 종이에 실리는 기사는 인터넷 기사보다 더 공들여 쓰거나 많이 손보기도 한다. 아직 인쇄매체를 보는 독자가 남아 있지만, 여전히 디지털보다 종이를 업무의 중심에 놓는 ‘페이퍼 퍼스트’는 모바일이라는 딴 세상에 가 있는 대부분의 독자와 거리가 먼 행태인 게 사실이다.

2013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뉴스타파>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 주관으로 마련된 ‘조세회피처 프로젝트 공동취재’ 기자회견에서 최승호 <뉴스타파> 앵커(맨 오른쪽) 등이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2013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뉴스타파>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 주관으로 마련된 ‘조세회피처 프로젝트 공동취재’ 기자회견에서 최승호 <뉴스타파> 앵커(맨 오른쪽) 등이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전통 언론은 팩트 발굴·검증, 탐사보도에 강점

전통 언론과 수용자의 이런 간극을 파고든 것이 뉴미디어 언론이다. 이들은 수용자 눈높이에 맞춰 쉬운 언어로 사안을 요약하고 맥락을 설명해준다. 기존 뉴스 가치에 얽매이기보다 수용자가 궁금해하거나 필요로 하는 이슈에 집중한다. 권위와 격식은 버리고 재미와 효율은 챙긴다. 수용자의 라이프스타일과 이용 플랫폼에 최적화된 소비 방식으로 접근성까지 높였다. 옆집에 이렇게 서비스 좋고 맛있는 식당이 신장개업을 했는데, 손님들이 불친절한 노포를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다.

이제 전통 언론의 시간은 끝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여러 한계와 문제가 있음에도 전통 언론만의 고유한 장점이 있다. 지금까지 제 기능을 잘 수행하지 못했지만, 민주주의 사회 공동체가 여전히 전통 언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공론의 장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로서 정확한 사실(fact)을 발굴하고 검증하는 것은 여전히 전통 언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다. 허위·조작 정보가 범람하는 디지털 시대에 특히 중요한 기능이다. 뉴미디어 언론이 제공하는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도 전통 언론이 보도한 ‘사실’이라는 원재료 없이는 불가능하다.

탐사·기획 보도를 통한 권력 감시와 견제도 전통 언론의 몫이다. 전통 언론은 풍부한 취재 인력의 협업과 취재 노하우를 통해 더 심층적이고 종합적인 보도가 가능하며, 이런 취재를 수행하는 뛰어난 인력을 양성할 수 있다. 탐사보도를 전문으로 하는 <뉴스타파>의 인력이 전통 언론사 출신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전통 언론이 뉴미디어 언론을 무작정 흉내 내거나 모방하는 것은 해답이 될 수 없다. 체급도, 기량도 다른 두 언론은 서로 갈 길이 다르다. 전통 언론과 뉴미디어 언론이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조화를 추구하는 모습이 뉴스 생태계의 바람직한 풍경일 것이다.

이제 전통 언론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과 ‘잘할 수 없는 일’을 명확히 구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수용자에게 전통 언론만의 대체 불가능한 효용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공영방송이나 공영통신이 아니라면, 보편적 수용자를 대상으로 모든 분야를 다루는 ‘백화점식’ 보도는 지양하고 탐사·기획 보도나 팩트체크와 같은 특정 영역을 중심으로 한 ‘선택과 집중’ 보도를 하는 쪽이 낫다.

수용자와의 소통은 언론의 본령

지금까지 소홀히 해왔던 수용자와의 소통에도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 뉴스룸 내부에 외부와 소통하는 전문 인력이 있어야 한다. 취재원 보호 같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뉴스의 원천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뉴스 생산 과정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수용자가 언론을 신뢰할 근거를 제공해야 한다. 오해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잘못이 있다면 빠르게 사과해야 한다.

물론 수용자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사이다’를 원하는 시민들에게 듣고 싶은 얘기만 들려주는 건 언론의 소명이 아니며, 때로 수용자의 믿음과 열망에 어긋나는 사실도 전달해야 한다. 이 때문에 누구 편도 들지 않는 비판적 보도를 하려면 의견이 다른 수용자와의 불화를 피할 수 없다고 믿는 기자들도 있다.

그러나 불편부당한 비판 보도와 수용자 친화적 보도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가 아니다. 수용자와의 적극적인 소통은 오히려 불편부당한 보도에 대한 시민사회의 튼튼한 지지를 유도하는 과정이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비판적 보도에 대한 수용자의 분노는 정보 부족과 그로 인한 불신에서 비롯되는 일이 많다. 언론이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선다면 수용자의 반응도 달라질 수 있다. 언론이 바뀌면 수용자도 바뀐다.

수용자와의 소통은 언론에 의한 일방적인 홍보도 아니고 무조건적 대중 추수도 아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의 초석을 마련하는 상호작용이다. 수용자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언론의 본령과 배치된다거나 핵심 과제가 아니라는 인식은 이제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수용자가 없다면 언론도 없다.

박영흠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초빙교수

*한겨레21 정은주 편집장의 ‘뉴닉’ 인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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