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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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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n]성범죄자들은 왜 군으로 가나

그들만의 세상에서 가해자 감싸는 군사법원
등록 2020-09-05 01:50 수정 2021-05-05 12:37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영상 원본 등이 담긴 CD 등이) 증거목록에 없습니다. 추가적으로 증거목록이 작성되어야 증거로 채택할 수 있습니다.”(군판사)

“필요하다면 추후 작성해서 제출하겠습니다.”(군검사)

2020년 8월7일 수도방위사령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열린 ‘박사’ 조주빈의 공범 이원호(20·닉네임 ‘이기야’)씨의 첫 재판에서 ‘증거조사’가 이뤄졌다. 피해자가 특정돼 추가(2차) 피해를 입지 않도록 모두진술(검사가 공소장의 기소 요지를 낭독하는 일)을 하라는 군판사의 요구에도 군검사는 공소사실을 상세히 밝혔다. 게다가 디지털 성착취·성폭력 영상 원본이 담긴 CD를 증거목록에 넣지 않고, 오히려 그걸 왜 넣어야 하느냐는 식으로 되물었다. 군판사는 외장하드와 휴대전화 메모리도 구분 못하는 등 디지털 기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였다. 결국 밀봉된 압수물을 법정에서 뜯어 피고인에게 해당 물품이 맞는지 직접 확인했다. 이게 2020년 디지털성범죄를 다루는 군사법원의 모습이다.

군인 등 관계자들이 가해자로 저지른 성범죄 사건은 그 피해자가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1심은 보통군사법원, 2심은 고등군사법원 그리고 마지막 3심만 대법원에서 진행된다. 입대 전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도 피고인이 현재 군인이기만 하면 사건은 군에서 맡는다. 그러다 재판이 길어져 피고인이 전역하면 다시 민간 법원으로 옮겨와 처리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당하는 인권침해나 재판의 비효율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군검사와 군판사는 현역 군법무관으로 구성되는데, 독립성·전문성에 대한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다. 군 형사사건의 상당수를 성범죄 사건이 차지하고 그 수도 늘어나고 있지만, 군에는 성범죄 전담 부서조차 없다.

성범죄 전담 부서 없는 군

낡은 군 사법제도로 인해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고통받고 있다. 군 내부의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인 군인이 버티지 못한 채 군 생활을 그만두거나 극단적 선택의 상황에 내몰리기도 했다. 군 외부의 성폭력 사건도 피해자가 제대로 법률 조력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가해자인 현역 군인은 선처받고 사건이 마무리된다. 특히 2015년 이후 디지털성범죄 재판이 군사법원에서도 많이 열렸는데, 피고인이 군검찰 조사 과정에서 증거인멸하거나, 군사법원이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형량과 판결 내용에서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이같은 내용이 외부에 잘 알려지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민간인 신분에서 성범죄를 저지른 20대 초반 남성들이 입대를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생겼다. 입대해 수사·재판 모두 군에서 맡으면 민간인 신분일 때보다 피고인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피고인에 대한 외부의 관심이 줄어드는 효과까지 있어 어차피 가야 할 군대를 십분 활용하려는 것이다.

가해자가 입대해버리면 피해자는 대응할 방법을 찾기 어렵게 된다. 우선 성폭력 피해자가 수사 과정에서 제대로 법률 조력을 받지 못하거나 ‘2차 가해’를 당하는 상황에 놓인다. 내가 반성폭력 활동가로서 피해자와 연대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 군수사관이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었던 장소에서 성폭력 피해 상황을 직접 재연하라고 요구했다. ‘북한이탈여성’에 대한 군 간부의 성폭력 사건에서 군검찰은 피해자에게 범행 당시 녹음 파일을 직접 듣게 하고 피해자의 신변 보호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피해자는 접근 어렵고 가해자는 숨기 쉬운

가해자가 기소돼 재판을 받더라도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는 일은 민간 법원보다 군사법원에서 더 제한적이다. 일단 군사법원은 민간인인 피해자가 출입하기 어렵고, 재판 기록물의 열람과 복사도 매우 한정적이다. 일부 변호사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기도 한다. 피해자 의사를 재판부에 전달하겠다고 해도 문서로 제출하라며 증언석에서 진술하는 걸 묵살하기 일쑤다. 게다가 피고인 등이 방어권을 이유로 소송 서류를 열람·복사하는 경우 피해자의 개인정보가 낱낱이 공개된다. 법은 엄격하게 적용할까. ‘폭행이나 협박’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토대로 고등군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한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등을 보면 군판사의 전문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성범죄는 어떨까. 2019년 10월 강원도 춘천에서 DSO(디지털성범죄아웃)팀과 연계해 일명 ‘지인 능욕’ 등의 디지털성범죄를 수년간 저지르다가 군대로 ‘도피’한 가해 남성의 재판을 방청했다. 그 사건의 수사·재판 과정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다루는 군 당국의 문제가 여실히 드러났다. 군검찰이 주요 증거물인 휴대전화에 대한 압수영장을 발부받았지만, 군 당국은 가해자의 외출을 허락해 가해자는 귀대 뒤 휴대전화를 분실했다고 신고해버렸다. 군검찰이 조사 중임에도 자유롭게 컴퓨터를 쓰도록 허락해 피해자의 합성사진이 또 유포되기도 했다. 피해자 쪽 문제제기에 군 당국은 ‘피고인 인권’을 운운하며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해당 사건과 관련해 군검사는 피고인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고, 군판사는 고작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그날 열렸던 다른 성폭력 사건들도 대개 3년 미만 형을 선고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갈 수 있는 길을 터줬다.

군사법원법 개정안 입법예고했지만

아울러 디지털성범죄와 관련된 군사법원의 이런 선처는 민간 법원에서 진행되는 다른 공범들의 선고 형량에도 영향을 미쳤고, 디지털성범죄자들의 감형이 잇달았다. 문형욱(‘갓갓’)의 공범(일명 ‘오프남’)으로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20대 신아무개씨. 그는 항소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으로 감형됐다. 신씨의 항소심 판결 전 신씨의 공범은 육군 제2작전사령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는데, 공범 간 처벌의 균형을 맞추려면 신씨도 감형돼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수용됐다.

2018년 2월 ‘군 사법제도 개혁안’을 발표한 군은, 2020년 5월 ‘군사법원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평시 군사재판 항소심(고등군사법원)을 민간 법원(서울고등법원)으로 이관’ ‘관할관의 확인조치권 폐지’ ‘심판관 제도 폐지’ ‘지역군사법원장 민간화’ 등이 핵심이다. 수사 과정에서도 독립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아직 군은 젊은 성범죄 가해자에게 ‘도피처’로서, 감형받을 수 있는 ‘선택지’로서 기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원호의 다음 재판은 9월7일 오후 1시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보통군사법원에서 비공개로 열린다. 영상 재생 등 증거조사를 할 예정인데,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지켜볼 일이다.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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