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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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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죽어야 죄를 따지는 사회

최숙현 선수 생전 폭행 피해 호소에 6개 기관 외면
“가해자·체육단체 영향력 완전 차단하는 독립기구 필요”
등록 2020-07-11 05:54 수정 2020-07-12 01:05
7월6일 고 최숙현 선수의 동료인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소속 선수들이 이용 미래통합당 의원 등과 함께 서울 여의도동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최 선수 사망사건과 관련해 피해 실태를 증언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7월6일 고 최숙현 선수의 동료인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소속 선수들이 이용 미래통합당 의원 등과 함께 서울 여의도동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최 선수 사망사건과 관련해 피해 실태를 증언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6월26일, 부산시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팀 최숙현(22) 선수가 세상을 향해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전 소속팀인 경주시청 김아무개 감독 등에게서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체중이 늘었다는 이유로 빵을 억지로 먹이고 토하게 하는 등 가혹 행위와 상습적인 폭언·폭행에 시달렸다고 여러 기관에 호소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경주시를 비롯해 국가인권위원회, 대한철인3종협회, 경주경찰서와 대구지방검찰청 경주지청, 대한체육회 클린스포츠센터까지 그 어떤 기관도 스물두 살 선수의 버팀목이 돼주지 못했다. 성적 지상주의에 매몰돼 폭력을 방관해온 ‘체육계 카르텔’뿐 아니라 어렵게 피해 사실을 신고한 선수를 보호·지원해야 할 시스템조차 작동하지 못하는 참혹한 현실이 죽음 뒤에야 수면 위로 또다시 드러났다.

최 선수 호소 모두 외면

최 선수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비난 여론이 들끓자 7월2일 경북 경주시체육회는 운영위원회를 열어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감독의 직무정지를 결정한다. 고인의 아버지 최영희씨가 2월6일 경주시청에 피해를 알린 지 5개월 만에 이뤄진 조처다. 경주시체육회는 경주시 위탁을 받아 시 재정이 투입되는 트라이애슬론 선수단(직장경기운동부)을 운영한다. 최영희씨는 “올해 2월 경주시청을 찾아 피해 사실을 설명했더니, 내일이라도 당장 (뉴질랜드 전지훈련을 간 감독을) 귀국시켜 조사하겠다고 했다. 2주가량 지나 연락이 없어 명함을 받은 공무원에게 전화해 조사 상황을 물었더니 ‘감독이 귀국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감독을 부르면 선수들이 훈련되겠느냐’는 답을 들었다”고 전했다.

7월6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 출석한 여준기 경주시체육회장은 조처가 늦어진 데 대해 “고소인(피해자)으로부터 받은 자료가 없다”고 해명했다. 2019년까지 경주시체육회장을 겸임한 주낙영 경주시장은 7월3일 애도문에서 “트라이애슬론 선수단은 경산시에 숙소를 두고 훈련해 선수단 내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했을 뿐 피해신고 처리 과정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고인이 대한철인3종협회에 제출한 징계신청서를 보면, ‘팀닥터’로 불린 안아무개씨에게 물리치료비 등의 명목으로 3년간 1천만원 넘는 돈을 건넸으며 폭행 피해를 당했다고 돼 있다. 경주시는 안씨와 고용계약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의사 자격을 갖추지도 못한 사람이 비공식적으로 팀닥터 노릇을 하며 폭력까지 휘둘렀다는 것이다.

올해 2월 최 선수와 가족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첫 진정서를 낸다. 2019년 조재범 전 국가대표 쇼트트랙 코치의 상습적인 성폭력·폭력 사건을 계기로 인권위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이 출범했다. 스포츠 분야 인권침해 심층 조사와 피해 상담·조사, 피해자 지원 등을 위해 범정부 차원에서 구성한 한시적(2019년 2월~2021년 2월) 조직이다. 그러나 이 조직을 운영하던 인권위는 최 선수 진정을 각하한다. 최 선수가 검찰에 고소해 수사 중이라는 이유에서다. 인권위는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라 진정 사실에 대해 수사가 진행 중이거나 종결된 경우 그 진정은 각하된다”고 설명했다.

그 무렵 대한철인3종협회에서도 최 선수의 호소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된 감독에게만 사실관계를 확인했을 뿐 자세한 조사는 하지 않았다. “2월10일께 협회에서 최 선수 사건을 인지해 해당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감독 말을 믿어 결론적으로 이번 일을 막지 못했다.”(박석원 대한철인3종협회장, 7월6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현안질의)

6월26일 숨진 최숙현 선수가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카카오톡 메시지. 연합뉴스

6월26일 숨진 최숙현 선수가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카카오톡 메시지. 연합뉴스


폭력 피해 선수 67%, “아무런 행동 못해”

고인과 가족은 검찰에 고소하면 철저하고 빠른 조처가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한 이들이 지속해서 혐의를 부인하면서 처벌이 어려울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대방은 변호사를 선임해 계속 혐의를 부인하니까 숙현이가 상당히 힘들어했다. ‘나도 변호사를 선임하고 싶다’고 해 서울에 있는 선배로부터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그게 5월 중순이었다.”(아버지 최영희씨)

7월6일 경주시청 팀에서 함께 운동한 선수 두 명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최 선수 사건) 경주경찰서 참고인 조사 과정에서 담당 수사관은 어떻게 처리될 것 같냐는 질문에 ‘벌금 20만~30만원에 그칠 것’이라며 ‘고소하지 않을 거면 말하지 말라’고 했다. 혹여 (가해자들이) 벌금형을 받으면 내가 운동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대회장에서 계속 만날까봐, 보복이 두려워 조사 이후 훈련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이날 두 선수는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은 감독과 특정 선수만의 왕국이었으며, 폐쇄적이고 은밀하게 상습적인 폭력과 폭언이 당연시돼 있었다”고 증언했다.

수사기관만 믿기 불안했던 고인과 가족은 4월8일 대한체육회가 운영하는 클린스포츠센터에 피해신고를 한다. 문체부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에 보고한 자료를 보면, 신고를 접수한 클린스포츠센터는 최근까지 증거자료 수집에 주력했다. 5월29일 경주경찰서는 김 감독에게 아동복지법 위반, 사기·강요·폭행 등의 혐의를 적용하고 팀닥터와 선배 선수 2명에게 폭행 혐의를 적용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다. 경찰 수사가 진척됐음에도 클린스포츠센터와 경찰 사이의 업무 협조는 이뤄지지 않았다.(남궁숙 클린스포츠센터 조사관, 7월6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현안질의) 고인이 어느 한 기관에서도 피해 구제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면서 여러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비슷한 조사만 이루어졌을 뿐 심리적 고통을 고려한 피해자 지원은 받지 못한 셈이다.

인권위가 2019년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 실업팀 선수 1251명에게 한 인권 실태조사를 보면 신체 폭력 피해를 본 사례는 326건(중복응답 포함)이었다. 이러한 피해를 경험한 선수 가운데 67%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인권침해 신고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가해자·체육단체 영향력 차단해야

국내 체육계에서 성폭력·폭력 사건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019년 1월 스포츠 선수들의 성폭력·폭력 피해 고발이 이어지자 문재인 대통령은 철저한 조사와 엄중한 처벌, 엘리트 선수 위주 육성 방식 전면 재검토 등 쇄신책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2019년 2월 문체부 주도로 민간 전문가 15명, 4개 부처 차관과 인권위 상임위원 등 모두 20명이 참여하는 민관 합동 스포츠혁신위원회가 꾸려져 모두 7개의 권고문을 발표했다.

2019년 5월 나온 첫 번째 권고는 “유명무실하게 운영된 체육계 내부 인권침해 신고·구제 절차와 명확히 구별되고, 가해자나 주변 이해관계자의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는 강력한 피해자 보호·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였다. 자율적이고 독립된 ‘스포츠 인권 기구’ 설립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국회에서도 독립된 권리 보호 기관을 만들자는 내용을 담은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이 잇따라 발의됐다. 2020년 1월 문체부 장관이 감독하는 법인 ‘스포츠윤리센터’ 설치를 뼈대로 한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7월7일 박양우 문체부 장관은 8월 설립 예정인 스포츠윤리센터의 권한 강화를 통해 인권침해 피해를 근절하겠다고 밝혔다. 법에 명시된 스포츠윤리센터 기능은 체육계 비리·인권침해 신고 접수와 조사, 피해자 지원, 예방교육·홍보 등이다. 그러나 기구만 만든다고 해서 인권침해 사건을 은폐·축소하던 관행이 곧바로 사라질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체부가 대한체육회 운영 실태를 관리·감독할 책임이 있지만 이러한 역할에 수동적이었다는 비판을 줄곧 받아왔기 때문이다.

민관 합동 스포츠혁신위원장을 지낸 문경란 스포츠인권연구소 대표는 “새로 설치될 기구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한 핵심 요소는 가해자와 체육 단체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하는 ‘독립성’ 확보”라며 “피해자가 여러 기관을 거치며 중복 상담·조사를 받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선 사안에 따라 경찰·인권위·성폭력피해자통합지원센터(해바라기센터) 등 여러 기관과 유기적인 연계망을 짜는 일도 중요하다”고 짚었다. 미국은 2017년 별도의 법률을 제정해 올림픽위원회 등 기존 스포츠 조직에서 분리된 국가 차원의 독립적 비영리기구 ‘세이프스포트’(SafeSport)를 만들어 성폭력과 아동폭력 등 인권침해 피해의 상담·조사·징계를 직접 진행하도록 했다.

이 밖에 ‘올림픽 메달을 위해서라면 인권은 유보될 수 있다’는 인식이 용인되는 국가주의·엘리트 중심의 체육 정책에서 탈피해야 인권침해를 뿌리 뽑을 수 있다는 지적도 거듭돼왔다. 허정훈 체육시민연대 공동대표(중앙대 스포츠과학부 교수)는 “올림픽 메달, 전국체전 실적에 매달리다보니 지도자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고 인권침해 피해를 발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며 “대부분 계약직인 지도자들 역시 성적이 좋지 않으면 그만둬야 하는데, 성적을 내기 위해 때려서라도 지도하겠다는 구습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폭력의 대물림 끊어야

7월6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현안질의에서도 감독 등과 함께 최 선수를 폭행했다는 의혹을 부인한 선배 김아무개 선수는 7월8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고인에 대한 폭행을 인정했다. 그는 그동안 “도저히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선배 잘못을 들추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김 선수 본인도 중학생 때부터 김 감독에게 맞았다고 말했다.

2012년 5월 경북 칠곡 지역언론엔 제41회 전국소년체육대회 트라이애슬론 여중 부문에서 금메달을 딴 꿈나무 최숙현 학생이 웃고 있다. 그로부터 겨우 8년. 스물두 살 선수의 숨통을 옥죈 체육계 폭력의 대물림을 2020년엔 끊어낼 수 있을까.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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