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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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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클로버] 아프고 나서 평원이 보였네

난생처음으로 받아본 B와 C로 가득 찬 성적표
등록 2020-07-04 13:14 수정 2020-07-09 00:54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면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성실한 편이었다. 알파벳으로 나뉜 성취도 절대평가에서 A만 받다가, 병원을 자주 다니고 진단받고 입원하고 증상이 몰아쳐 일상이 무너진 뒤 수업도 수행평가도 많이 놓치고 난생처음으로 B와 C로 가득 찬 성적표를 손에 넣었다. 실패,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첫 경험이었다.

누군가는 안타까운 기색을 내비치며 “그건 네 성적이 아니야, 아팠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지…”라고 말했지만 나는 안다. 그것은 내 성적이다. ‘아픈 나’도 나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어도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받아들이는 일뿐인데, 그것은 오래 걸리고, 또 마음이 아픈 일이었다. 2019년, 중학교 3학년 2학기 중간고사는 입원해 있느라 아예 보지 못했고, 기말고사를 보러 학교에 갔다.

나는 시험 준비는 고사하고 그 내용이 출제되는 수업을 거의 듣지 못했기 때문에 기본 지식으로만 시험을 봐야 했다. 많이 찍었고 전체적으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점수를 손에 들었다. 그런데 국어와 도덕 점수가 높았다. 국어는 지문에서 출제되므로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덕은…. 나보다 훨씬 열심히 공부한 아이가 많았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은 물론, 내가 놓친 수업을 들었다는 건 시험 점수가 나보다 앞설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시험에 출제된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받은 좋은 점수가 부끄러웠다. 회의감이 들었고, 우습고도 슬펐다. 우리가 그토록 목매던 좋은 시험 점수, 그것은 대체 뭘까? 그건 우리를 평가하는 최전선의 잣대였다. 어떤 어른은, 아니 우리도 가끔은 서로, 시험 점수 하나로 우리의 성실함과 지능, 멀리는 가능성까지 판단했다. 내 사정은 모르고 도덕 점수만 아는 사람은 나에게 “좋은 성적을 얻었구나, 축하한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구나”라고 말할 거였다. 그 너머의 진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렇다면, 어쩌면 시험 점수가 나타내는 게 우리의 극히 일부가 아닐까? 아주 많은 변수에 좌우되는 그런 것 아닐까?

책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탑을 오르는 애벌레들이, 꼭대기로 갈수록 품으면서도 서로 쉬쉬하는 의문이 있다. ‘어쩌면, 저 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이 위로 올라오고자 노력했던 다른 수많은 애벌레들은? 여기까지 올라오고자 몸부림쳤던 나의 시간은, 그동안 받았던 나의 상처는….’ 인정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현실이라서 다들 모른 척했던 것은 아닐까?

시험 점수는 우리의 지극히 일부만을 담고 비춘다. 우리는 그것으로 전체가 평가되기에는 아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커다란 미래를 꿈꾸는 존재였다. 물론 등급으로 나누는 것처럼 동일하고 협소한 잣대로 평가를 마치면 편리하다. 한 아이가 걸어온 시간을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숫자만 보고 판단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오류를 범하기 쉽고, 잔인하며 폭력적이다. 아이들의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고 다른 길은 없다고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거다. 좌절을 맛본 뒤 딛고 성장하는 것이 어려워지도록. 내가 병에 걸리고,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졌다며 절망해서 다시 일어나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내 위치를 나타내는 지표라고 믿었던 것, 성적이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내 앞에 있는 세상이 꼭대기만 보고 올라가는 좁은 계단으로 이루어진 종탑이 아니라 평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좁고 높은 탑을 올라가는 무리에 합류하려다가, 병이라는 거대한 망치가 탑을 부숴버리고야 비로소 내 앞에 평원이, 바다가, 산이, 강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탑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경계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지만 말이다.

신채윤 고1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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