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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 이미 소를 잃은 외양간

등록 2020-06-20 06:10 수정 2020-06-22 01:15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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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능을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멀쩡한 건물을 정치적 이유로 폭파시키는 일은 정상국가에선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독재국가의 만행에도 나름의 계산과 계획은 있기 마련이다.

북한 ‘내부 수요’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일리 있다. 연이은 감염병 피해와 북-중 국경 봉쇄로 그러잖아도 국제 제재로 허약한 북한의 경제 사정은 최악이라는 분석이다. 따라서 외부의 적을 핑계로 내부 결속을 도모해 지도자에게 걸리는 정치적 부담을 피해보자는 게 아니겠냐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가 북한을 경제적으로 좀더 도와주는 거로 상황 관리가 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일회성 지원은 거부한다. 가난한 사람 처지에선 평생 도움만 받는 삶은 굴욕이다. 근본적 문제를 해결해 자립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대미 협상으로 체제 보장과 제재 완화를 얻어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어려운 경제 상황은, 타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대미 협상을 1차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근거가 된다고 봐야 한다.

판문점선언에서 베트남 하노이 회담까지 과정은 남한의 중재로 북한은 비핵화 초기 단계 이행을, 미국은 체제 보장과 제재 완화의 일부를 내놓게 하는 것이었다. 이게 성에 차지 않으면 남한이 경제협력으로 보완한다는 약속도 있었다. 이 구도는 ‘문재인-김정은-트럼프’라는 지도자들의 조합이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하노이 회담은 ‘노딜’로 끝났다. 이후 미국은 북한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의 후임으론 존재감 없는 인물이 왔고, 부장관으로 승진한 스티브 비건은 닭 한 마리 요리에 몰두하고 있다. 남한도 미국에 막혀 독자적 해법을 내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은 장담 못할 일이 되고 있다. 북한으로선 ‘다른 해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떠넘기기(?)로 악용되는 남한의 ‘중재’를 거부하고 벼랑 끝 전술로 직접 대미 협상에 나서는 것이다. 이 경로라면 미 대선 전에 결국 ‘레드라인’ 근처까지 갈 수도 있다. 이로 인한 군사적 긴장은 우리도 감당해야 한다.

비공개 특사 제안을 포함해 ‘중재’를 거부당한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듯하다. 예상되는 북한의 군사행동에 현명하게 대응하면서 미시적 차원에서 위험관리를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현장에선 작은 사건도 큰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 북한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선을 넘으면 단호하고 절제된 대응을 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대북정책을 둘러싼 환경 전반을 점검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과거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한 류길재씨는 “솔직히 통일부 장관은 아무나 와도 되는 자리 같다”고 했다. 그때와 비교해 통일부의 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의문이다. 김연철 장관이 사의를 표명한 배경에는 이런 현실도 있지 않나 한다.

국회에서 국가정보원에 대해 “대통령에게 희망 섞인 보고만 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과거 정부에선 북한붕괴론이라는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가 문제였다는데, 이번엔 같은 일이 반대로 일어난 게 아닌가 의문이 든다. 청와대는 부정했지만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사의 표명설도 있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란 말이 있는데, 이미 소를 잃었는지도 모르겠으나 그래도 쇄신은 해야 한다.

김민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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