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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민주주의, 일시적 분노로 바뀌지 않는다

경비노동자 주민 갑질 피해 막으려면 입주민에게도 ‘사용자 책임’ 부과하고 지자체도 개입해야

제1318호
등록 : 2020-06-19 15:01 수정 : 2020-06-2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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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회단체 활동가들이 6월12일 서울 강북구 ㅅ아파트 앞에서 한 달여 전 입주민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비노동자 최희석씨와 관련해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회견은 이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일부 주민이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막아서는 바람에 중단됐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저 유명한 김갑두를 조심하라고 진즉 말해줬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모두가 치를 떠는 인간이 저 작자요. ‘갑질의 두목’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붙여준 이름이지. 저자의 등쌀에 그만둔 경비원이 여럿이라오.”

공기업을 정년퇴직한 뒤 ‘임시, 계약직, 노인장’(줄여서 임계장) 일자리인 아파트 경비 일을 시작한 지 29일째 되던 날 조정진씨가 동료에게 들은 말이다. 앞서 조씨는 경비원 고유 업무라고 보기 힘든 주민용 음식물쓰레기통을 공동수도에서 씻다 김갑두에게 수돗물을 많이 쓴다는 이유로 “어이, 경비! 이 새끼, 당장 잘라야 할 놈이네”라는 폭언을 들었다. 조씨는 고단한 경험담을 담은 단행본 <임계장 이야기>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며 “(갑질을) 당하고 보니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만큼 무서운 학대였다”고 고백했다.

그런데도 아파트 안에서 갑질을 당하는 경비노동자가 입주민한테 대항하지 못하는 까닭은 최저임금을 받는 일자리나마 잘릴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조씨는 “시급 노동자로 일하는 동안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자른다’였다. …‘너 아니라도 일할 사람은 널려 있다.’ 이 말은 아파트 자치회장의 언어 습관에 가까웠다”고 고발한다.

‘너 아니라도 일할 사람 널려 있다’는 말

조씨는 그마나 운이 좋은 경우라고 할 수 있을까? 서울 강북구 ㅅ아파트에서 경비로 일하던 중 주민 심아무개씨에게 폭행과 협박 등 ‘학대’에 시달리다 끝내 5월10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최희석씨도 지속해서 심씨의 해고 위협에 시달렸다. 최씨 유가족이 심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소장을 보면, 심씨는 처음 사건이 일어난 4월21일 평행 주차된 자신의 차를 밀고 있는 최씨한테 “야 이 자식아, 경비 주제에 너 우리가 돈 주는 거로 먹고살면서 왜 하지 말라는 짓을 하냐”며 최씨 얼굴을 때린 뒤 “너 이 자식, 당장 사직서 써라”라고 했다. 심씨는 이틀 뒤 경비실 입구에서 또 최씨한테 “여기 꿀단지 묻어놨냐. 왜 그만 안 두냐, 이 새끼야”라며 폭언을 퍼부었다. 이후에도 심씨는 최씨를 폭행하며 해고 위협을 멈추지 않았다.

이는 최씨한테 실제 마음의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ㅅ아파트 취업규칙에는 “입주민의 편의 서비스 제공과 친절 등 그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때”와 “입주자대표회의 3인 이상 또는 아파트 입주민 10인 이상이 연대서명으로 직원의 해임 요청이 있을 때”(제42조)에는 해고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이런 임의 조항은 입주민이 경비노동자 등에게 갑질을 해도 저항하기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해당 취업규칙의 같은 조항엔 “불순한 목적으로 아파트 내에서 허가 없는 집회, 시위, 집단구호 제창, 연설 등 근로자를 선동 또는 소요를 획책하는 자”도 해고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민주주의 일반 원리에 맞지 않는 내용으로, 경비노동자 등의 헌법상 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

7년째 아파트 경비노동자들과 모임을 하는 안성식 노원노동복지센터장은 “경비노동자에게 가장 큰 문제는 고용 불안정으로, 이들은 근로계약 기간 만료나 아파트 동대표 선거, 관리업체 변경 등을 앞두고 심각한 고용 불안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한 아파트 단지 1층 들머리 게시판 앞을 경비원이 지나가고 있다. 게시판에는 경비노동자의 시급을 최저임금 기준에 맞추는 대신 휴게시간도 현행보다 1.5시간 늘린다는 입주자대표회의의 공고문이 붙어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공동체 대신 ‘재산’으로 여기다보니

심씨처럼 아파트 노동자를 학대하는 입주민은 극소수일지 모르나, 아파트 공간에서 경비노동자가 주민에게 비인격적 대우를 받는 일은 드물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해 11월 ‘아파트 경비노동자 고용안정을 위한 조사연구 및 노사관계 지원사업 공동사업단’이 전국 아파트에서 일하는 경비노동자 3388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넷에 한 명꼴(24.4%)로 ‘입주민에게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 조사에서 경비노동자가 처한 노동조건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다. 경비노동자의 고용 안정성을 엿볼 수 있는 근로계약 기간을 보면 94.1%가 ‘1년 이하’라고 답했다. 특히 경비노동자 다섯 중 한 명(21.7%)은 ‘3개월짜리 계약을 한다’고 답해 단기 계약 관행이 아파트 단지마다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서 경비노동자가 맡은 업무의 비중을 묻는 말에 대한 응답을 보면, 경비노동자가 본연의 업무인 경비 말고 다른 업무로 겪는 어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본래 업무라고 할 수 있는 ‘방범’은 31%였고 분리수거(21%), 청소(19%), 주차관리(12%), 택배(11%), 조경(5%) 등 다른 업무가 69%에 이르렀다. 최희석씨는 입주민 주차관리 과정에서 심씨한테 폭행당했고, ‘임계장’도 분리수거를 비롯해 각종 청소 업무 등에 시달렸다.

전체 국민 열 중 여섯이 사는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이자 공동체 성격이 강한 아파트에서 이런 비민주적인 노동 행태가 나타나는 까닭은 뭘까. 전문가들은 아파트가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중산층의 상징으로 자리잡으며 급속도로 보급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재산 증식의 수단인 상품으로만 인식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주하는 공간으로서 인식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측면에 주목한다.

정헌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인류학)는 “아파트가 싸게 사서 비싸게 되파는 매매를 반복해 재산을 증식하는 수단으로 여겨지는 과정에서 입주자는 3∼4년 뒤에 더 좋은 아파트로 옮겨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예되는 삶의 공간이 됐다”며 “그렇다보니 일부 백화점 고객이 ‘소비자가 왕’이라며 노동자한테 갑질하듯, 입주민이 아파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폭언과 폭행을 하는 데도 아파트가 생활공간이라기보다 돈 주고 사는 상품이라는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경비·환경미화 등 내부 노동자를 바라보는 일부 입주민의 왜곡된 시선도 이런 시각의 연장선에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이란 임금과 노동자의 노동력을 맞바꾸는 동등한 계약 관계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잊는다. 최희석씨가 마지막으로 근무한 다음 날인 5월4일 주민 심씨가 최씨한테 보낸 문자메시지 내용은 이런 인식의 극단을 잘 보여준다. 심씨는 “다른 사람들 얘기로 ‘머슴’인 최희석씨의 끝이 없는 거짓이 어디까지인지, 용서할 수가 없네요… (내) 수술비만 이천만원 넘고 장애인 등록이 된다니 참 남들 얘기로 ‘머슴’한테 가슴 맞아 넘어져서 디스크 수술을 해야 하는 등 무슨 망신인지 모르겠소”라며 계속 최씨를 ‘머슴’이라고 불렀다.

노동권 침해돼도 입주민 책임 추궁 어려워

노동계는 아파트 주민의 노동자를 향한 폭언과 폭행을 막고 아파트 내부를 민주화하기 위해 입주민한테 ‘사용자로서의 법적 책임’을 지울 것을 요구한다. 입주민이 경비노동자에게 일을 시키는 사실상 사용자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는 데 따르는 책임을 지는 게 민주사회 일반원리에 맞는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11월 공동사업단이 벌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경비노동자의 9.4%만 입주자대표회의에 직접 고용됐을 뿐 나머지 90.6%는 관리사무소를 운영하는 위탁관리회사(25.4%)나 위탁관리회사가 재하도급을 준 경비용역회사(65.2%) 소속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비노동자 열에 아홉은 노동 관련 분쟁이 생겨도 주민이나 입주자대표회의에 직접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구조다.

권두섭 민주노총 법률원 대표변호사는 “근로기준법의 직장 내 괴롭힘 처벌 조항과 산업안전보건법의 감정노동자 보호 조항 등 사용자 관련 조항을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용역업체 등과 함께 적용받아야 한다. 이렇게 공동의 관리 책임을 지게 하면 지금처럼 중간에 용역업체가 끼어 주민의 책임성이 사라지는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역과 자치 분권의 문제로 접근해 해결하려는 목소리도 힘을 얻는다. 우선 지방자치단체가 경비노동자의 고용 안정에 나서는 방안이 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지자체의 시설관리공단이 경비노동자를 고용한 뒤 지역 내 아파트에 파견하는 방안이 있다. 공공기관이 직접 고용하면 지금보단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부 묻기만으로도 갑질 막을 수 있다

아파트의 ‘헌법’과도 같은 공동관리규약에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해고를 함부로 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을 담는 방안도 제시된다. 이를 위해 서울시 등 지자체들은 최희석씨 사망 사건 이후 지자체가 제시하면 개별 아파트 단지가 공동관리규약 표준 모델로 가져다 쓰는 준칙 개정에 나섰다. 이남신 서울노동권익센터 소장은 “경비, 환경미화 등 아파트 내부 노동자의 인권 보호를 위한 내용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논의 중”이라고 했다.

공동관리규약을 집행하는 주체로서 아파트 민주주의의 핵심 기구이자 경비노동자의 사실상 사용자로서 책임이 있음에도 횡령 등 비리와 비민주적 운용으로 끊임없이 입길에 오르는 입주자대표회의의 정상화가 더욱 중요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정헌목 교수는 “경비와 청소 노동자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입주자대표회의에 들어가면 당장에라도 조금씩 바꿀 수 있는데, 입주민의 관심이 너무 적은 게 문제”라고 짚었다.

심재철 전 서울 석관동 두산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은 2014년 이듬해 최저임금 100% 적용을 앞두고 경비노동자 대량해고가 유행하던 시절 이를 막아낸 기억을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그는 용역업체가 떼먹은 경비노동자 퇴직금을 찾아주고 주민들 반대에도 불법주차 차량에 벌금을 매기는 방식으로 경비노동자와 주민의 마찰을 막았다. 심 전 회장은 “동대표가 경비노동자와 대화하고 전화번호를 주고받기만 해도 주민 갑질의 90%는 막을 수 있다. 일시적으로 분노해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아파트 민주주의> 저자  남기업 소장
“아파트 회계감사, 지자체에 맡기자”

박승화 기자

입주민 갑질을 비롯한 아파트 내부의 민주주의 문제는 결국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불거진다. 아파트 최고 권력기구인 탓이다. 그럼에도 입주자대표회의에 대한 입주민의 관심은 매우 낮다. 2015년 9월 아파트 동대표 선거에 나가고, 내친김에 입주자대표회장이 되기 전까지 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 소장의 생각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당신은 입만 열면 정의를 말하면서 왜 마을 일에는 무관심하냐”는 이웃의 말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4년간 ‘구악’스러운 전임 동대표·대표회장 등과 수십 건의 고소·고발을 주고받는 난타전을 벌이며 아파트 내부 민주주의를 고민한 남 소장은 최근 펴낸 단행본 <아파트 민주주의>(이상북스)에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담았다.

남 소장은 입주자대표회의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공간으로 본다. 사심이 가득 찬 이들이 선량한 이들을 내쫓는 곳이다. 입주민의 무관심이 문제인데, 그 근본에 부동산 불로소득이 놓여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6월18일 서울 중구에 있는 연구소에서 만난 남 소장은 “아파트 가격은 위치만 좋으면 계속 오른다. 건물을 잘 관리하는 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주민들이 아파트 관리에 관심 가질 이유가 많지 않다”고 했다. 오래된 아파트일수록 재건축 연한에 가까워진다는 이유로 값이 오르는 게 현실이다.

남 소장은 여러 비리로 훼손되는 아파트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면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선 입주자대표회의가 선정한 업체 쪽이 관리소장을 보내는 현행 방식을 벗어나, 지자체가 임기제 관리소장을 파견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입주자대표회의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관리소장이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남 소장은 “질이 떨어지는 동대표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관리소장이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가 되면 입주민 가운데 괜찮은 이가 대표로 나올 것이다. 그러면 사심에 찬 이가 대표회장을 맡는 일은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입주자대표회의가 외부 감사업체를 선정하는 현행 제도도 개선해야 한다. 내부 비리를 막지 못하는 탓이다. 대신 지자체가 직접 아파트 회계 감사를 맡는 방안을 내놨다. 지자체가 아파트 단지에 주는 다양한 지원을 결정할 때 이런 제도를 받아들인 아파트 단지에 가산점을 주는 것이다.

남 소장은 “도시민의 70% 이상이 아파트에 사는 상황에서 아파트는 자치와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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