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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사무소 폭파, 극단 치닫는 남북...군사문제 해법부터

무시는 불신을, 불신은 파국을 낳았다
등록 2020-06-20 05:07 수정 2020-06-20 06:11
노동신문 뉴스1

노동신문 뉴스1

북한의 막말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대표되는 충격요법을 둘러싸고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북한의 언행이 잘 이해되지 않는 만큼, 그 배경과 원인에 대한 분석도 대개 억측에 머물고 있다. 가령 CBS(기독교방송) 김현정 앵커는 6월16일 방송에서 “원인에 대해서는 하나로” 모아진다며 이렇게 말했다.

“<뉴스쇼> 인터뷰를 통해서 여러 전문가들의 분석을 여러분, 들으셨습니다. 거의 비슷한 분석이었어요. 북한의 경제 상황이 정말 안 좋다, 내부 불만이 쌓이고 있다, 남한은 경제적으로 도와준다든지 지난 2년간 실질적으로 도와준 게 없다, 그런데 모욕적인 대북 삐라(전단)는 계속 날아온다, 더 이상 못 참겠다, 여차하면 군사 도발까지 가겠다, 이런 거라는 거죠.”

강경한 북한, 경제난 때문일까

우리는 북한의 경제 사정을 잘 모른다. 미국이 주도하는 강력한 경제제재에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북한 경제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만 존재한다. 그런데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북한 경제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10~20%에 불과해 북-중 교역이 크게 위축돼도 경제에 미친 영향이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북한은 제재에 맞서 국산화 비중을 비약적으로 높여왔다. 아울러 강요된 ‘폐쇄 경제’가 코로나19의 영향을 최소화한다는 역설적인 진단도 가능하다. 최근 북한이 대규모 군중집회를 하루가 멀다 하고 하는 것을 보면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하지 않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대남 강경책의 원인을 경제난에서 찾는 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노선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제재 해결 기대감이 싸늘하게 식자 ‘자력갱생’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전부터 자력갱생을 강조했지만 이를 전면화한 것은 지난해 말 노동당 전원회의였다. 그런데 불과 6개월도 안 됐는데 경제가 어려워져 남한에 분풀이한다고? 이는 자력갱생 실패를 자인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게 민심 수습책이 될 수 있다고? 난 어색하다고 본다.

물론 늘 그랬듯이 북한 경제는 어려울 것이고 최근에 더 어려워졌을 수도 있다. 경제난의 원인 가운데 하나를 남한의 약속 불이행으로 보고 대남 강경책을 펼 수도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그래서 더 분명한 이유를 짚어봐야 한다. 그것은 바로 ‘최고 존엄’ 모욕 사건의 기원이다. 북한이 연일 대북 전단 살포를 ‘최고 존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비난하고, 국내의 많은 전문가도 이것이 대남 강경책의 주된 원인이나 빌미가 된다고 짚는다. 그런데 주목할 게 있다. 북한이 말하는 ‘최고 존엄’이 낭패를 보고 모욕까지 당했다고 여기는 일이 비단 대북 전단 살포에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기섭 개성공단기업 비상대책위원장(왼쪽 셋째)이 6월17일 서울 영등포구 개성공단 기업협의회 사무실에서 입주기업 현황표를 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정기섭 개성공단기업 비상대책위원장(왼쪽 셋째)이 6월17일 서울 영등포구 개성공단 기업협의회 사무실에서 입주기업 현황표를 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하노이 노딜과 ‘최고 존엄’의 모욕

‘낭패 사건’은 2019년 2월 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을 뜻한다. 평양에서 66시간 동안 열차를 타고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김 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영변 핵시설을 완전히 폐기할 테니 대북제재를 완화해달라고 제안했다. 이는 2018년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내놓은 중재안에 기초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문재인 정부의 중재에 크게 실망한 김 위원장은 2019년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남측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대남 실망은 곧 증오로 악화되고 만다. ‘당사자’가 돼줄 것으로 기대했던 문재인 정부에 의해 ‘최고 존엄’이 모욕당했다고 여긴 일이 벌어졌다. 스텔스 전투기 F35 도입이 연이어 이뤄지고 한-미 연합훈련도 실시될 것으로 보이자, 김 위원장은 2019년 7월25일 ‘권언’을 내놨다. “남조선 당국자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평화의 악수’를 연출하며 공동선언이나 합의서 같은 문건을 만지작거리고 뒤돌아 앉아서는 최신 공격형 무기 반입과 합동 군사연습 강행과 같은 이상한 짓을 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남조선 당국자가 사태 발전 전망의 위험성을 제때에 깨닫고 최신 무기 반입이나 군사연습과 같은 자멸적 행위를 중단하고 하루빨리 지난해 4월과 9월과 같은 바른 자세를 되찾기 바란다는 권언을 남쪽을 향해 오늘의 위력 시위 사격 소식과 함께 알린다”고 했다.

이후 상황은 김 위원장의 ‘권언’이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2019년 8월11일 시작된 한-미 군사훈련에는 ‘수복지역에 대한 치안·질서 유지’와 ‘안정화 작전’까지 포함됐다. 이는 사실상 북한 점령 훈련을 의미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약속을 뒤집고(북한은 2019년 6월30일 판문점 회동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약속했다고 주장) 합동군사훈련을 강행한 것도 문제였지만, 이 훈련에 이들 내용까지 포함한 것은 더욱 큰 문제였다. 사흘 뒤 국방부가 2020~2024년 국방중기계획을 공개하면서 5년간 무려 290조5천억원의 국방비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다음날 문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남북이 평화경제론을 실현해 일본을 따라잡자는 취지로 연설했다. 그러자 북한의 정부 기관들과 매체들은 문재인 정부를 향해 경쟁적으로 막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2018년 2월10일 문재인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왼쪽), 김영남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청와대사진기자단

2018년 2월10일 문재인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왼쪽), 김영남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청와대사진기자단


김정은 ‘권언’과 남한의 군비 증강

북한은 4·27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가운데 지켜진 것이 뭐냐고 문재인 정부를 몰아붙인다. 그런데 부분적으로 지켜진 것이 있었다. ‘9·19 군사 합의’(2018년)가 그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 합의의 이행이 신속하고도 순조롭게 이뤄졌다며 “사실상의 종전선언”이라는 의미까지 부여했다. 이러한 의미 부여는 북한의 대남 불신과 배신감을 키워줬을 공산이 크다.

전통적으로 남한은 군축에 앞서 군사적 신뢰 구축과 운용적 군비통제(군사력 배치 조정·제한)부터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북한은 군축을 우선시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2018년 ‘4·27 판문점회담’과 ‘9월 평양회담’에서 조율됐다. “군사적 긴장 해소 및 신뢰 구축에 따라 단계적 군축을 실현해나가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군사적 긴장 해소 및 신뢰 구축” 수준에서 멈췄고 오히려 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 증강에 나섰다. 김 위원장의 ‘권언’도, 북한 기관과 매체들의 비난도 소용없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던 국방비는 올해 50조원을 돌파했고,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세계 12위로 평가받던 군사력은 6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권언’까지 내면서 대규모 군비 증강과 한-미 연합훈련의 중단을 요구했던 김 위원장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판문점회담과 평양 남북정상회담 때 북한군 수뇌부를 총출동시켜 문 대통령에게 거수경례하게 했다. 최대로 예우해 ‘단계적 군축’을 추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벌어진 일은 정반대였다. 체면이 깎인 김정은 정권의 대남 불신과 증오는 이렇게 커졌다. 급기야 2020년 6월17일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담화에서 “북남관계를 책임진 주인의 자세와 입장으로 돌아오라는 우리의 권언과 충고에 귀머거리, 벙어리 흉내를 내며 신의와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린 것은 과연 누구인가”라며 막말을 쏟아냈다.

남북관계 파국의 원인을 군사 문제 중심으로 살펴본 이유가 있다. 군사 문제는 북한의 대남 증오에서 중대한 원인이 되어왔는데, 정작 이를 거론하는 전문가나 언론은 거의 없다. 이상 징후가 2019년 하반기부터 확연히 나타났는데, 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이유도 있다. 군사 합의는 제재 같은 국제적 제약과 무관한, 그래서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할 수 있었던 분야다.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라

마찬가지로 위기에 처한 남북관계를 구할 수 있는 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대북제재 같은 구조적 제약을 당장 뚫을 수 없다면 그 제약과 무관한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 또한 북한의 호응 여부와 관계없는 일을 찾아야 한다. 북한의 독기를 빼낼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이 세 가지를 관통하는 조처로 뭐가 있을까? 대북 전단 살포 규제,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 그리고 국방비 감축을 통한 ‘단계적 군축’ 의지 표현이 있다. 이를 통해 김 위원장이 동생에게 이런 지시를 내리게 해야 한다. “그만하라.”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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