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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알맞은 삶의 비용은 얼마?

등록 2020-05-16 07:46 수정 2020-05-21 01:38
매월 말 모아둔 영수증으로 돈을 주로 어디에 얼마나 쓰는지 기록하고 있다. 

매월 말 모아둔 영수증으로 돈을 주로 어디에 얼마나 쓰는지 기록하고 있다. 

반드시 ‘주 5일, 하루 8시간’ 일해야 할까? 월급 200만~300만원이 꼭 필요할까? 도시에선 대부분 시간과 에너지를 직장 업무에 쓰고 나면 정작 나와 가족을 위한 시간은 거의 없었다. 월급이 많지 않더라도 맞벌이를 하니 통장에 돈은 쌓였지만 삶의 질은 점점 낮아졌다. 생계노동에만 시간을 쏟고, 나머지 시간은 더 건강한 일상을 가꾸고 하고 싶은 활동에 투자할 순 없을까? 그렇다면 우리 부부가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비용은 어느 정도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게 ‘부부의 영수증’을 기록한 큰 이유였다.

남해로 이주한 초반에는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마음만 앞섰다. 제일 만만한 게 식비라, 사고 싶은 재료 대신 값싼 재료로 장바구니를 채웠다. 빵집에서 갓 나온 천연발효 식빵 대신 마트에서 대용량 토스트빵을 샀고, 무항생제 달걀 대신 제일 싼 달걀을 샀다. 하지만 ‘일주일 식비 2만원’ 목표는 오래가지 못했다. 집에서 다양하고 새로운 요리를 하기 원하는 남편과 값이 더 나가더라도 건강한 식재료를 사고 싶은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대신 ‘꼭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쓰자’는 대원칙을 세우고, 우리의 욕구와 필요를 최대한 고스란히 가계부에 반영해보기로 했다.

이주 초반에는 차량 구매와 이사 등으로 생활비가 예상을 한참 웃돌았지만, 최근 3개월간 한 달 생활비는 약 100만원이었다. 보험과 월세, 전기와 수도를 비롯한 각종 공과금에 평균 40만원이 지출되고, 남은 60만원으로 식비와 교통비, 문화생활과 각종 부대비용을 충당했다. 둘 다 씀씀이가 크지 않은 덕분이다. 몸치장에 관심 없어 지난 석 달간 옷이나 화장품은 사지 않았다. 유명한 공연을 보거나 특정 브랜드 상품을 모으는 취미도 없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값비싼 스테이크나 파스타를 사 먹는 것보다, 집에서 된장찌개를 끓여 먹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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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비나 다른 비용을 아끼는 대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갑을 열었다. 남해 이주 뒤 목공에 흥미를 갖게 된 남편은 아카시아 집성목 등 그때그때 필요한 나무와 자재를 사서 집에서 쓸 조명과 커피 스탠드, 책꽂이 등을 만들었다. 나는 최근 스테인드글라스에 관심이 생겨, 유리칼과 인두기 등 각종 용품을 샀다. 한 달 전부터 남편과 함께 해보고 싶었던 팟캐스트도 시작했는데, 휴대전화 녹음 기능에 의존하다가 녹음용 마이크도 3만원을 주고 샀다.

한 달에 100만원. 우리 부부의 경제적 부피를 숫자로 확인하니, 막연했던 경제적 불안감은 줄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새로 삶을 재구성할 여지가 훨씬 더 커졌다. 각자 한 달에 50만원만 벌어도 기본 생활은 가능할 테니, 서로 시골에서 생계를 위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나머지 시간에는 무얼 하고 싶은지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낯선 지역에서 새 일상을 가꿔나가고 싶은 분이 있다면, 본인에게 알맞은 삶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측정해보면 어떨까. 막연히 몇 년 뒤로 미뤄뒀던 계획이 어쩌면 훨씬 더 가까운 내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글·사진 권진영 생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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