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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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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섬세함’이 무섭다

‘여성 특유의 ○○○’, 이분법이 가리는 사람의 개별성
등록 2020-05-16 06:37 수정 2020-05-17 01:21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 여자가 고위직에 오르면 이런 인물 기사가 여전히 나온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냥 섬세한 것도 아니고 ‘특유하게’ 섬세하단다. 뭐가 됐건 나한텐 없다. 나는 여자가 아닌가? 여성에게만 발견된다는 그 정체불명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왜 국내 200대 상장기업 임원 중 고작 2.7%만 여성인가?

“남성 특유의 둔감함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

대기업에 다니는 한 여자친구는 이런 기사를 읽으면 “골 때린다”고 했다. 이 회사 관리직 중 유일한 여자이자 때수건처럼 까칠한 인간이다. “꼼꼼하고 예민한 남자 상사, 얼마나 많은데. 성차가 아니라 개인차야. 저렇게 쓰는 건 여자는 직장에서 그렇게 행동하라는 말인 거 같아.” 친구는 원래 웃기지 않으면 웃지 않는데 미소 따위 걷어내고 남자 후배한테 지시하니 후배가 대놓고 “선배 무서워요” 했단다. “아, 뚜껑 열려. 진짜 무서웠으면 그렇게 대놓고 말 못하지. 진짜 무서운 남자 상사한테는 그렇게 말 못해.” 친구는 그런 기사를 한번 보고 싶단다. “남성 특유의 둔감함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

“여자들은 공감 능력이 뛰어나니까.” 나는 이 말이 무섭다. 공감과 이해의 짐을 지울 때 밑밥 까는 말 같기 때문이다. 남자가 공감하려 들지 않으면 진화에 따른 유전자 탓이지만 여자가 그렇지 못하면 그 여자는 ‘비정상’이다. 존 그레이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같은 책에선 남자는 ‘원래’ 문제가 생기면 동굴에 들어가 혼자 해결하려 드니 내버려두라고 한다. 여자 연인은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며 세월아 네월아 동굴 밖을 서성이라는 건데 그 여자의 타는 마음은 누가 공감해주나? 공감 없이 지속하는 관계는 없다. 공감은 노~오력해야 하는 일이다. 노력하지 않으니 공감할 수 없는 거 아닌가?

“딸은 애교도 많고 공감도 잘하고 노후에 부모도 잘 돌본다.” 딸을 향한 상찬같이 들리는데 불편하다. 1950년대생인 우리 엄마가 평생 감내해야 했던 “큰딸은 살림 밑천”이란 말의 다른 버전 같다. 딸을 인간이 아니라 기능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살림 밑천이 되길 거부한 큰딸들은 ‘이기적인 X’가 됐고, 애교도 공감도 모자란 딸은 ‘이상한 딸’이 된다. 딸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공감의 짐을 지운다.

“열 여자 마다하는 남자 없다.” 남성을 향한 비하처럼 들리지만 자기가 필요할 때면 ‘동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권력을 드러낸 말이다. 남성은 이성, 여성은 몸이란 이분법은 성차별의 근간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데 특정 상황에서만 남성은 이성을 상실한 동물을 자처한다. 사실 이건 동물 폄하이기도 하다. 성폭력당한 피해자를 비난하는 태도나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처벌 같지도 않은 처벌의 밑바탕엔 ‘남성의 성욕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면 바꿀 수 없다

진화 탓인가? 남성은 되는대로 많이 유전자를 뿌리고 여성은 보수적으로 선택하도록 진화했나? 마리 루티는 책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에서 어떤 지식도 생산자가 지닌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진화심리학은 ‘과학’을 내세워 성차별 문화를 ‘자연적 진리’로 쐐기 박으려 한다고 비판한다. 무엇을 질문할 것인지가 이미 연구자의 가치판단을 반영한다.

1969년 아서 젠슨은 백인과 흑인의 지능지수 차이를 ‘과학적’으로 보여주고 그 원인을 유전자에서 찾았다가 엄청난 비판에 부닥쳤다. 그러면 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자연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하나? 데이비드 버스는 37개국 1만47명을 대상으로 짝짓기 선호를 연구해,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중심으로 책 <욕망의 진화>를 썼다. 남성과 여성은 섹스와 자원을 거래한다는 거다.

그런데 마리 루티는 똑같은 데이터로 두 성 간 비슷한 점이 더 많다는 책도 충분히 쓸 수 있다고 반박한다. 남성과 여성 모두 ‘상호 끌림-사랑’, 신뢰성, 정서적 안정과 성숙함, 긍정적 성향을 짝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가장 중요한 특질로 뽑았다. 순서도 같았다. 여성은 ‘금전적 전망’을 12위에 두지만 남성은 13위로 꼽았는데, 버스는 이 ‘차이’를 강조하는 데 방점을 둔다고 루티는 비판했다. 전통적인 문화일수록 남녀 차이가 또렷하고 산업화한 사회에선 그 차이가 줄었다는 점은 버스 자신도 인정한다. 어디까지가 문화의 영향이고 어디까지가 자연적인 건가?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면 바꿀 수 없다.

새의 생식을 파고들어 성선택에 따른 진화를 연구한 리처드 프럼은 책 <아름다움의 진화>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진화심리학은 남성적 시선을 적응으로 착각한 나머지, 성차별적 편향을 인간의 진화생물학에 투사해버리고 만다. (중략) 현대 여성들이 과거에 진화를 통해 얻은 성적 자율성을 완전히 향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주범은 가부장제라는 문화의 진화였다.”

남성과 여성이란 이분법 자체가 인위적이다. 정희진은 책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에서 “인간을 양성으로 나눈 ‘판타지’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며 “이분법은 비대칭적”이라고 썼다. 백인과 유색인이란 이분법이 위계를 드러내듯이 남성과 여성도 그렇다. 이 이분법이 ‘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한 위계도 유지된다. 간성 등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된다. 중간지대에 놓인 사람들은 모두 ‘비정상’으로 떨어진다.

한 사람은 이분법 너머에 있다. 인간을 두 카테고리에 밀어넣고는 사람의 개별성을 볼 수 없다. 마리 루티는 “(남성과 여성의 본질적 차이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는)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한다고 착각하게 하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 핑계로 쓰인다”고 지적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한 사람의 특성을 설명하려 든다는 건 그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하며, 알 생각도 없다는 고백이다.

그저 녹아 없어질 것들

수전 팔루디는 마초였다가 76살에 성전환 수술을 받고 여자가 됐다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600쪽 넘는 벽돌책 <다크룸>을 썼다. 헝가리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탈출했으면서도 헝가리를 향한 애국심에 불타는 이 사람, 폭력을 불사하며 가족 위에 군림하던 ‘남자’였다가 ‘숙녀’에 들러붙는 온갖 클리셰를 온몸으로 구현하는 ‘여자’가 된 이 사람은 누군가? 죽어가는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그를 바라보며 팔루디는 이렇게 썼다.

“유대교도인가 기독교도인가? 헝가리인인가 미국인인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너무 많은 상반되는 것들이 함께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의 누워 있는 몸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구분, 단 하나의 진정한 이분법이 있구나. 삶과 죽음.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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