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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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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로 일 시키고 돈도 안줬는데, 품앗이라고요?

장애인 특성 고려하지 않는 ‘장애인복지법’ 강제노동 해석,
2018년 보건복지부가 장애인 학대로 꼽은 주요 사례 10건 중 실형은 단 한 건
등록 2020-05-09 06:54 수정 2020-05-12 01:32
단위: %, 자료: 2018 장애인 학대 현황 보고서(보건복지부,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

단위: %, 자료: 2018 장애인 학대 현황 보고서(보건복지부,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는 어떤 형태로든 일절 금지된다.”(세계인권선언문 제4조)

19세기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사회적 계급제도가 철폐됐다. 1926년 노예협약이 노예제와 노예 매매를 불허한 이후, 1948년 세계인권선언문, 1957년 강제노동철폐협약 등 국제적으로 노예제에 관한 인권 규범이 확립됐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노예’라는 단어는 유효하다. 2006년 배추농사 노예, 2014년 염전 노예, 전복양식장 노예, 2016년 축사 노예, 2018년 야구장 노예까지 현실에 살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노예는 이른바 ‘노예처럼 일한다’는 은유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노예’, 남의 소유물로 되어 부림을 당하는 사람(표준국어대사전)이다.

인권침해 아닌 단순 임금체불

고전적인 노예제는 사라졌지만, 강제노동이라는 형태로 유지되는 ‘현대판 노예제’ 한복판에 지적장애인들이 있다.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2019년 9월 내놓은 ‘2018 장애인 학대 현황 보고서’를 보면 2018년 학대로 판정된 사례 889건 중 지적장애(66%)를 포함해 자폐성장애·정신장애 같은 ‘정신적 장애’가 있는 학대 피해자 사례는 74.1%였다. 학대 피해자 대부분이 정신적 장애인이다. 지적장애인이 겪는 학대로 경제적 착취(25.5%)와 신체적 학대(24.5%)가 엇비슷하게 일어났다. 경제적 착취는 ‘노동착취’를 포함한다.

장애인 노동착취 사건의 경우 근로관계법령은 고용노동청(고용청) 근로감독관이 수사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고용청에는 장애인 노동 전담 근로감독관이나 조사 매뉴얼이 없다. 대규모 사업장 위주로 정기 근로감독을 하고, 영세 사업장의 지적장애인 노동착취 사건은 제보나 언론 보도로 사건이 접수됐을 때만 감독을 나간다. 지적장애인은 자신이 학대당한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스스로 신고하는 것도 10%에 그치기에 신고에만 의존하는 근로감독 수사 행태로는 장애인의 피해를 막기 어렵다.

지적장애인의 노동착취는 피해 기간이 수십 년에 이를 정도로 장기적이지만, 가해자가 노동착취로 처벌되는 일은 흔치 않다. 수사기관이 범죄나 인권침해로 보지 않고 단순 임금체불 문제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현행법에서 지적장애인의 노동착취 피해에 적용되는 법률은 근로기준법(임금 미지급, 강제근로)과 최저임금법, 장애인복지법(강제근로, 유기), 형법 등이 있지만 수사기관이 대다수 사건을 임금 미지급으로 판단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임금 미지급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공소를 제기할 수 없고(반의사불벌죄), 피해자가 몇십 년을 일하더라도 임금채권 소멸시효 3년에 따라 3년치 임금만 받고 합의해 근로감독관이 사건을 종결하는 게 일반적이다.

2013년 미국 지적장애인 착취, 1인 배상액 91억원

근로기준법 제7조와 장애인복지법 제59조의 9, 제2조의 2호엔 자유의사에 어긋나는 ‘강제노동’(강제근로)을 금지하지만 사실상 사문화돼 있다. 수사기관이 해당 법조항 적용에 소극적인데다 법원은 폭행·협박 없이도 지적장애인이 강제노동을 하게 되는 장애 특성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당 조항들의 구성 요건에 폭행·협박·감금 등이 있는데 지적장애인은 폭행·협박·감금 없이도 노동착취에 놓인 사례가 많다.”(이정민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 소속 변호사) 자유의사라는 개념도 불분명하다. “10년가량 학대 피해를 본 사람에게 ‘(피해 현장에서) 살겠냐’고 물으면 살겠다고 한다. (수사·사법기관은) 장애라는 취약성을 이용해 착취했다고 보지 않고, 장애인을 돌봐줬다고 인식해 ‘일을 시켰으면 임금은 줘야지’라는 단순 노동 문제로 여긴다.”(이 변호사)

장애인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고 ‘품앗이’로 보는 경우도 많다. 2018년 전남 곡성에 살던 지적장애 3급인 ㄱ씨는 이웃 주민 ㄴ씨의 지시로 약 17년 동안 거의 매일 ㄴ씨의 논밭에서 고추, 토란, 벼, 참깨, 고구마 등 농사를 했지만 임금은 받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ㄱ씨의 마을 사람들도 비슷한 진술을 했지만 수사기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건을 조사한 광주지방고용노동청은 “강제로 일을 시킨 적은 없으며 일손이 일부 필요할 때 품앗이 개념으로 ㄱ씨가 일을 도와준 것”이라는 ㄴ씨 진술을 받아들여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고, 검찰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피해자 쪽이 항고했지만 기각돼 현재 재항고한 상태다. “노동착취가 사법시스템으로 가면 (관행이라고) 습관적으로 말한다. 염전 노예 사건 때도 (광주고법은) ‘지역적 관행’이라며 감형했다. 이런 이유로 처벌하지 않거나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게 피해를 키운다.”(김강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정책국장)

2018년 보건복지부가 장애인 학대로 꼽은 주요 사례 10건(재판 진행 2건 제외)에서도 약한 처벌이 반복됐다. <한겨레21>이 확인한 가해자 처벌 중 불기소 처분은 1건, 합의나 처벌 불원은 4건, 벌금형은 3건, 집행유예는 1건이었다. 실형은 단 1건에 그쳤다. 현행법으로 가해자 처벌이 가능한데도, 지적장애에 대한 몰이해로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아 장기간 다수의 노동착취를 유발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칠면조 가공 공장에서 수십 년간 지적장애인의 노동착취가 있었던 미국에선 연방법원이 2013년 업체에 2억4천만달러(약 2940억원)를 손해배상하라고 평결했다. 피해자 1인당 배상액은 750만달러(약 91억원)이다. 소송은 피해자를 대신해 연방정부기관인 연방 고용기회평등위원회(EEOC)가 수행했다. 정부에서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인신매매’로 규정할 수도

노동착취를 학대에서 한발 더 나아가 ‘노동 인신매매’ 개념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이 2015년 비준한 ‘인신매매 방지 의정서’는 인신매매 범위를 넓게 규정한다. △강제노동 등 착취 목적 △취약한 지위 남용한 수단 △모집·은닉 등 이동 행위가 있을 때 인신매매로 인정하는데, 전남 신안 염전 노예 사건의 경우 인신매매 사건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종철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는 “봉고차에 밀어넣고 끌고 가는 것만 인신매매로 떠올리는데, 신안 염전 노예 사건의 경우 장애인의 취약성을 이용하거나 속여, 착취 목적으로 인수하기도 했다. 의정서가 규정한 인신매매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영국은 노예법에서 노예, 예속, 강제노동과 인신매매를 할 경우 최고 법정형으로 종신형을 내린다. 이탈리아는 특별법(인신매매금지법)으로 인신매매를 정의하고 그 수단의 상세 규정을 두고 있다. 이 법을 어겼을 때 8년 이상 2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한국은 의정서 비준 전인 2013년 이행 입법으로 형법을 개정해 인신매매 조항(사람을 매매한 자는 징역 7년 이하)을 만들었지만, 인신매매 정의에 대해 자세한 규정이 없는데다 적용 사례도 거의 없다. “인신매매죄가 신설된 뒤 인신매매 형사소송 판례를 찾아보니 고작 8건이 있었다. 그중 노동착취 인신매매는 없었다. 조항 자체가 엄청 무력한 거다. 피해자 보호까지 아우르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김종철 변호사)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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