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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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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물류 창고 화재, 산재도 판박이 화재 원인 오보도 판박이

‘K방역’의 대성공과 대형 산재사망, 극적인 차이에 답하라
등록 2020-05-09 05:16 수정 2020-05-09 12:40
4월29일 경기도 이천시 (주)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공사장에서 큰불이 나 노동자 38명이 사망했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제공

4월29일 경기도 이천시 (주)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공사장에서 큰불이 나 노동자 38명이 사망했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제공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 하루 뒤이자 세계 노동절을 이틀 앞둔 4월29일, 경기도 이천시의 한 물류창고 공사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많은 사람이 연휴 시작으로 들떠 있던 날, 38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은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2020년의 이 비극은 곧바로 2008년의 유사한 사고를 소환했다. 2008년 1월에도 이천의 한 냉동물류창고 공사현장에서 불이 났고, 40명이 사망했다. 왜 우리는 2008년에서 배우지 못했는가? 불과 얼마 전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성공적 대응 비결로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의 교훈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K방역’의 대성공과 대형 산재사망 사고의 반복. 우리에겐 이 극적인 차이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원인에 대한 신문 오보도 그대로

‘조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느 나라든 사고나 재난이 발생한 뒤 원인을 규명하는 노력에 힘을 쏟는다. 조사 기관들이 예산과 인력, 시간을 투자해 비극적인 사고 현장을 돌아보고 고통을 겪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수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유사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함이다.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 결과가 반드시 제대로 알려지는 것은 아니다.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의 추정이 마치 조사 결과처럼 알려진 채 몇 년이 흐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섣부른 원인 추정과 사고 직후에만 집중되는 언론의 관심 때문이다.

이번 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 다음날, 언론은 일제히 2008년 화재 원인과 판박이라며 ‘용접 불꽃’과 ‘샌드위치 패널’을 원인으로 짚었다. 2008년 당시 근로감독관으로 화재 사고를 조사했던 강태선 세명대 보건안전공학과 교수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2008년 화재 현장에 용접작업은 없었고 불충분한 환기로 인해 톨루엔 농도는 국지적으로 폭발 하한에 근접했다’)이 아니었다면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원인이 잘못 알려져 있다는 말에 이천소방서에서 발간한 백서 외에, 2009년 2월 일본어로 발표된 ‘40명이 사망한 냉동창고 화재의 조사분석’, 2010년 4월 <안전보건 연구동향>에 실린 ‘이천 냉동창고 화재 조사 보고서’ 등을 찾아 읽었다. 어떤 자료에도 용접 불꽃이 원인이라고 명시돼 있지 않았다. 이들 자료는 공통으로 ‘점화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일 작업일지와 목격자 증언 등을 통해 용접작업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고, 공사시 사용된 가연성·인화성 물질의 증기가 건물 내부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 대형 참사의 원인’이라고 봤다. 이른바 ‘폭발 하한치’ 상태였기 때문에 공구가 떨어지며 생기는 스파크나 형광등 램프로도 화재가 발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용접 불꽃’이 핵심 원인일 경우, 책임은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해당 노동자 혹은 작업반장이 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폭발 하한치’가 핵심 원인일 경우, 강제 환기를 할 수 있는 설비를 설치하지 않은 시공사에 책임이 있다. 이처럼 핵심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핵심 책임자도, 이후 대책도 달라진다.

실제 조사 결과와 다른 ‘용접 불꽃’이 2008년 화재의 원인으로 소환된 이유는 당시 초기 보도에서 불꽃으로 인한 폭발이 언급됐기 때문이다. 언론 기사에 비해 백서나 논문, 보고서가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떨어져서 생긴 일이며, 당시 사고 조사를 담당한 여러 전문가의 증언으로 곧 정정된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12년 동안 소수 전문가를 제외하고 사회 전반이 2008년 화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는지를 방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5월6일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 공사장 화재 사고 합동 분향소에 모인 유가족들. 연합뉴스

5월6일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 공사장 화재 사고 합동 분향소에 모인 유가족들. 연합뉴스


이미 있는 법, 세 차례 화재 주의 경고

사고 원인을 찾다보면, 법의 내용과 집행 사이 간극이 큰 한국의 고질적 법 관행이 사고 현장에서도 어김없이 관철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사고를 예방할 관련법이 없는 ‘규제 미비’의 상태라면 신규 입법으로 해결하면 된다.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대책으로 언급되는 ‘난연재 의무화’ 등이 신규 입법이 필요한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사고 예방을 위한 법·제도가 이미 있는데도 지켜지지 않는 ‘규제 미준수’가 더 큰 문제이다. 앞서 언급한 ‘강제 환기’와 관련한 제도가 그러하다. 인화성 증기가 밀폐된 건물 내에 계속 머무를 위험이 있을 때 환기를 충분히 해야 한다는 조항은 2008년 화재 당시에도 있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2008년 화재 이후 이에 대한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기 위해 유해·위험 설비를 설치·이전·변경할 때 계획서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제출하는 ‘유해위험방지계획서 심사·확인 제도’가 도입됐다. 이 제도에 따라 이번에 화재가 발생한 이천 물류창고 공사현장은 세 차례나 화재 주의 경고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러한 경고에도 건설사는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배울 수 있을까

건설 현장은 특히 규제 미준수가 만연한 곳이다. 규제 미준수의 해법은 기본적으로 현행 규제가 제대로 적용되도록 감독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법 집행의 결함을 ‘규제 미준수’가 아니라 ‘감독 부재’로 지칭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도 있다. 또 이러한 감독을 요청·압박할 노동조합 같은 사회세력의 존재도 중요하다. 그러나 건설 현장은 발주처, 시공사, 하청, 재하청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일반화돼 책임을 아래로 떠넘기기 쉽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거나 분산되면 관련 법을 지킬 동인도 줄어든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서 노동조합 역시 취약할 수밖에 없어 엄격한 관리감독을 압박하기도 어렵다.

규제 미준수 문제에 대한 해법은 크게 두 축에서 제안된다. 우선 질병관리본부나 소방방재청과 같이 산업안전보건청을 독립시켜 관리감독을 더 철저히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공공영역을 강화해 법의 집행을 담보하겠다는 뜻이다. 다른 축은 기업이 스스로 안전보건 의무를 준수하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법인 벌금 부과와 사업주 처벌을 강화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이 대표적이다.

왜 배우지 못했느냐는 질문을 따라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를 들여다보다 27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다친 1998년 부산의 냉동창고 화재에도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알았다. 2008년 화재 당시 1998년과 판박이라고 말하며 ‘공사현장에 만연한 안전불감증’을 헤드라인으로 꼽았던 12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전문가들은 제도적·구조적 원인을 적절히 짚으며 사회운동의 역량과 여론의 관심도 더 높다. 2008년 화재 때보다 조사 인원도 더 보강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야말로 반복되는 산재사망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기술적 교훈을 얻는 과정이, 사고 조사에 대한 과학주의적 입장이 말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여러 재난 연구의 지적을 떠올린다. 사고 조사는 과학과 기술만의 영역이 아니다. 특히 사회구조적 원인을 밝히고 해결하려 할 때 정치와 사회의 역할이 커진다. 가연성 자재나 환기 미비의 문제는 1998년에도, 2008년에도 지적됐다. 과학과 기술의 부족으로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게 아니라, 정치적 의지와 사회적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참사는 다시 발생했다.

정치와 사회가 응답해야 한다

우리는 왜 코로나 방역의 대성공과 대형 산재사망 사고의 반복이라는 극적인 대비를 목격하게 됐는가? 과학이 아니라 응답해야 할 정치와 사회 쪽에서 응답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건설 비용 상승을 감수한 난연재 의무화는 상상도 못할 일이고, 안전 규제를 지키도록 원청 책임까지 강화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기업 이윤을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이제는 거부할 수 있을까. 미래의 동료 시민들을 살릴 수 있을지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박상은 재난연구자·플랫폼C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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