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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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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도몰랑] 그래도 까꿍은 잘해

묵언수행 육아에 아내의 타박 “제발 말 좀 해라”
등록 2020-05-04 15:29 수정 2020-05-08 01:21
5개월쯤부터 주양육자를 아빠로 인식하는 듯한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안겨 있다가도 아빠를 보면 웃는다.

5개월쯤부터 주양육자를 아빠로 인식하는 듯한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안겨 있다가도 아빠를 보면 웃는다.

요즘 넷플릭스에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줄줄이 올라와 즐거운 복습을 하는 중이다. 개중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 사람 얼굴을 한 사슴신이 나온다. 사슴신이 걸을 때마다 발굽이 닿은 곳에선 갑자기 수풀이 울창하게 자라고 꽃이 피어난다. 그의 숨결이 닿으면 칼에 찔린 상처도 하룻밤 새 말끔히 낫는다. 다친 사람을 고쳐주고 죽은 것을 되살리는 생명력. 인간은 이런 생명력을 갈구하기에, 예수 같은 메시아가 이런 능력을 가졌다고 믿기도 한다.

이런 근원적인 생명력이 아이 안에 속삭인다는 느낌이 든다. 3.64㎏으로 우람하게 태어난 아이는 6개월 만에 8.8㎏으로 2.5배 정도 늘었다.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수많은 뼈와 근육과 장기와 기관이 엄청난 속도로 자라면서도 어떻게 정교한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는 몸의 성장과 더불어 다양한 기술도 착착 습득해간다. 뒤집기, 옹알이, 잡기, 물기, 뜯기, 마시기 등 몇 달 만에 능력치가 빠르게 올라간다. 특히 점점 원하는 대로 손을 쓸 수 있었다. 분유를 받아먹기만 하다 이젠 젖병을 가까이 가져가면 두 손으로 젖병을 받아 스스로 먹는다. 떡뻥튀기를 손에 쥐여주면 혼자 다 먹고, 또 달라고 칭얼대며 손을 내민다. 새벽 대여섯 시에 일어나 칭얼대며 아빠를 깨운 뒤, 아빠가 앞에 나타나면 그 작고 통통한 손을 뻗어 아빠 얼굴을 조몰락거린다. 그 손길에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나에게 의지하고 애정을 주는 걸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야 했던 중요한 이유 하나를 알아가는 느낌이다.

아이가 5개월쯤 되니 나를 조금씩 주양육자로 인식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안겨 있다가도 나를 보면 활짝 웃는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낯을 가리기 시작했다. 부모님 집에 아이를 맡겨놓고 나왔다가, 세 시간 만에 아이 울음을 배경으로 “아이가 숨넘어갈 듯이 운다”고 연락이 와서 급하게 다시 들어간 적도 있었다. (아, 이제 아기를 두고 외출할 자유도 사라지는 건가.)

아이와 관계에서 주양육자라는 의미가 더 커지지만, 내가 그 역할을 잘해낼지 여전히 자신이 없다. 특히 나는 아이와 놀아줄 때 ‘텐션’(반응 정도)이 떨어진다. 아내가 주말에 아이와 종일 놀아주는 모습이나 다른 엄마들이 올린 유튜브 영상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 끊임없이 아이와 잘 놀아주는지 부럽다.

나는 특히 말하는 게 힘들다. 과장된 몸짓을 하고 높은 톤으로 말하는 게 잘 안 된다. 내가 묵언수행하듯이 묵묵히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거나 놀아주는 모습을 아내가 보다못해 한마디 한다. “제발 말 좀 해라.” 하지만 어떻게 하나. 영어 문법엔 빠삭하지만 정작 회화는 못하는 한국인들처럼 입이 잘 안 떨어지는걸. 이러다 아이가 말 배우는 게 늦어지거나 사회성에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닌가 슬며시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도 장점이 없는 건 아니다. 몸으로 놀아주는 건 좀더 잘하는 듯하다. 까꿍하기, 간지럽히기, 안고 뒹굴기를 하면 아이는 자지러지며 웃는다. 그림책처럼 읽을거리가 있으면 나는 비로소 입을 열어 열 권이고 열심히 읽어준다.

아이가 태어나면 도마뱀이 허물 벗듯 애벌레가 나비 되듯, 부모도 육아에 맞는 몸으로 탈바꿈하면 얼마나 좋을까. 난 도마뱀이나 나비가 아니니, 그저 시간이 가며 좀더 나아지길 바랄 뿐이다. 난 이미 아빠지만, 아빠가 되어가는 중이기도 하다. 아빠가 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글·사진 김지훈 <한겨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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