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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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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가위를 집어들었네

읍내가는 대신 집 한복판에 차린 자가 미용실
등록 2020-04-29 10:07 수정 2020-05-02 19:29
마을의 폐교 운동장에 야외 미용실이 열렸다. 처음 보는 광경에 구경꾼이 많았다.

마을의 폐교 운동장에 야외 미용실이 열렸다. 처음 보는 광경에 구경꾼이 많았다.

한 달에 한 번만 열리는 미용실이 있다. 우리 부부가 집에서 여는 미용실이다.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작은 의자를 놓기만 하면, 미용실은 완성이다. 유일한 손님인 남편의 행색 역시 단출한데, 머리를 깎는 내내 몸에 걸친 건 속옷뿐이다. 미용실 가운 대신 두를 게 딱히 없고, 옷을 입은 채 머리를 잘라보니 세탁 뒤에도 남아 있는 머리카락 때문에 따끔거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다. 미용사인 내 모습도 어설프긴 마찬가지. 머리를 잘라본 적도 없고 미용 기술도 전혀 없으니, 가위질이 영 서투르다.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 없는 미용실이지만, 우리 부부에게만큼은 실속 있고 간편한 미용실이다.

남해에 이주해 지난 8개월 동안 단 한 번도 미용실에 가지 않고 집에서 머리를 잘라왔지만,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친구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직접 이발한 지 10년이 넘었다고 했는데, 마침 남편이 지인 결혼식에 가기 전 머리를 다듬어야 한다고 하니 남편이 직접 잘라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금산을 바라보고서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고, 남편 어깨 위에는 화려한 보자기가 둘러졌다. 구경 온 다른 친구는 직접 거울을 들고 있겠다고 했고, 야외 미용실에는 구경꾼이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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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경험이 주는 파장은 컸다. 남편은 이후 내게 자기 머리를 직접 잘라달라고 했다. 읍까지 나가야 하는 수고를 줄이고 이발비도 아낄 수 있다고 말이다. 결국 마지못해 여러 미용도구를 샀다. 처음에는 미용가위 잡는 법도 몰라 동영상을 찾아 봤는데, 역시나 첫 도전 결과는 대실패.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남편 뒤통수를 볼 때마다 너무 괴로워서, 머리를 잘라달라고 한 남편을 원망했다가, 제발 읍내 미용실에 가라고 애원했다. 어떻게든 실패를 만회해보려 동영상을 내내 붙잡고 있으니, 나중에는 남편이 제발 그만 보라고 말렸다.

다행히 갈수록 사정은 나아졌다. 남편 머리는 잘도 자라서 다시 미용가위를 여러 번 들게 됐다. 이발 뒤 남편 모습은 훨씬 더 자연스러워졌고, 몇 번 해보니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최근 남편이 직접 내 머리를 잘라주었는데 꽤 만족스러운 단발이 됐다. 남편의 첫 가위질이라, 어쩐지 양쪽 길이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미용실에 가지 않고 네 번이나 집에서 서로 머리를 잘라주었으니, 이것저것 사들인 미용도구의 본전은 건진 셈이다. 읍내에 가서 1만5천원씩 내고 이발해왔다는 이장님 말씀을 듣고 나니, 자가 미용실의 이문은 더 크게 잡아도 될 듯하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은 시골의 불편함은 때론 삶의 능동성을 발휘하고 몰랐던 재미를 발견하게끔 한다. 읍내까지 나가기 싫은 게으른 마음과 한 푼이라도 아껴보자는 절약 정신이 더해져 시작된 자가 미용실은 이제 우리 부부에게 자급자족을 향한 즐거운 실험이 되었다. 앞으로 써내려갈 영수증에서 ‘미용실’은 확실히 덜어냈으니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 영수증에서 또 어떤 것을 덜어낼지, 대신 더해질 새로운 삶의 기술은 무엇일지 기대된다.

글·사진 권진영 생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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