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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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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와 코로나, 두 번의 ‘세계 건축사의 기적’

샤오탕산병원, 2003년 사스를 ‘괴담’ 치부하다 궁지 몰리자 지은 ‘세계 건축사의 기적’
등록 2020-04-19 14:37 수정 2020-05-02 19:29
중국 정부가 코로나19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2월3일 착공해 열흘 만에 완공한 후베이성 우한의 훠선산병원. 중국은 2003년 사스가 유행할 때는 베이징 인근 샤오탕산에 불과 일주일 만에 전담 병원을 지었다. 신화 연합뉴스

중국 정부가 코로나19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2월3일 착공해 열흘 만에 완공한 후베이성 우한의 훠선산병원. 중국은 2003년 사스가 유행할 때는 베이징 인근 샤오탕산에 불과 일주일 만에 전담 병원을 지었다. 신화 연합뉴스

2003년 초였던 거로 기억한다. 그해 설날이 2월1일이었으니까 아마도 설을 지내고 난 뒤였을 것이다. 한 선배와 집 근처에서 밤새도록 맥주를 퍼마시며, 당시 한창 화제였던 ‘괴질’ 관련 괴담을 안주 삼아 떠들고 있었다. 2월 중순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전국 각지에서 설을 지내고 온 사람들이 하나둘 베이징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중국에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광저우에서 정체를 모르는 괴질이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 정부와 언론에선 이런 이야기를 근거 없는 괴담이라고 못박았다. 그러면서 괴담을 퍼뜨리는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는, 중국에선 꽤 익숙하고 유서 깊은 ‘협박’도 잊지 않았다.

미국에서 발생했으나 ‘스페인 독감’ 된 사연

한스 노이바우어가 쓴 에는 ‘소문을 퍼뜨리는’ 이발사 이야기가 나온다. 기원전 413년 10월, 그리스 아테네의 항구인 피레우스에 있는 한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으러 온 낯선 여행자가 이발사에게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아테네 함대가 전멸되고 총사령관도 죽었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발사는 곧바로 아테네 시내까지 몇 시간을 달려가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당시 세상의 온갖 수다쟁이와 떠돌이가 모여서 허풍과 잡담을 주고받는 장소가 ‘이발소’라는 점과, 그곳에서 일하는 이발사라는 직업,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려준 ‘증인’ 역시 떠돌이 여행자라는 점이 중요한 판단 근거로 작용해서, 결국 이발사는 허풍쟁이가 되어 십자가에 못이 박혔다. 이발사는 온종일 모진 고문을 받다가, 전투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증명해준 뒤에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이발사는 팔다리가 다 작살났지만, 혀는 멀쩡해서 풀려나자마자 형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정말 총사령관 니키아스가 죽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지금부터 약 100년 전인 1918년 20세기 최대 역병이라는 ‘스페인 독감’이 발병했다. 어떤 전쟁보다 더 비극적이었던 이 역병도 처음에는 아테네 인근 항구도시의 이발사가 퍼뜨린 ‘헛소문’ 취급을 받았다. 원래 이 역병은 스페인에서 생긴 게 아니라, 1918년 3월 미국 캔자스주에서 처음 보고됐다. 하지만 해당 지역의 질병본부나 정부 관료 누구도 그 이상한 독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 전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이라 정신없던 때이기도 했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가 이 독감에 걸리자, 스페인 신문들이 이 신종 질병에 관한 기사를 처음 내보내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보도 탓에, 20세기 최대 역병이던 그 독감은 ‘스페인 독감’으로 불리게 됐다. 1차 대전 당시, 유럽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중립국이던 스페인의 자유로운 언론 보도 때문에 역설적으로 역병의 발원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다. 미국에서 최초로 발생했던 이 독감을 왜 ‘미국 독감’이라 하지 않고 ‘스페인 독감’으로 부르게 됐을까?

‘신비한 바이러스’는 소문이다

을 쓴 제니퍼 라이트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발원지인 미국과 주요 참전국인 영국 등에서 시행한 엄격한 ‘검열법’ 때문이다. 기자들이 언론 검열법 때문에 ‘감옥에 가기 싫어서’ 알면서도 진실을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에는 “미국 정부에 관한 불충하거나 모독적이거나 악의적이거나 독설적인 표현을 발언, 인쇄, 집필 혹은 출판하면 20년 이상 수감될 수 있다”는 ‘전시 사기 진작을 위한’ 검열법이 있었다. 영국에도 마찬가지로 “군대나 민간인 사이에 불만이나 공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을 말이나 글로 퍼뜨려서는 안 된다”는 ‘국토방위법’이 있었고, 심지어 ‘저널리스트 반역자’는 처형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니 어떤 기자가 ‘목숨 걸고’ 신문지상에 ‘역병이 돈다’고 떠들어댈 수 있었겠는가?

2003년 2월 중순, 베이징에 파다하게 퍼진 ‘괴질 괴담’의 정체는 머잖아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해 3월15일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해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라는 새로운 전염병 바이러스로 명명됐다. 하지만 괴담이 사실로 밝혀졌을 때는 이미 수도 베이징은 ‘역병이 창궐하는’ 중세도시로 변해 있었다.

광저우 괴질 괴담은 2002년 12월부터 이미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와 인터넷 등을 타고 전국 각지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관련 내용을 중국 언론 최초로 보도했던 는 2003년 1월4일, ‘‘신비한 바이러스’는 소문이다’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불명확한 바이러스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 소문일 뿐이다. 그런 말을 믿지 마라. 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그저 단순한 계절성 감기로 인한 폐렴 환자일 뿐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신비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최초 환자는 2002년 12월5일 감기 증상으로 근처 병원을 찾았던, 선전에서 요리사로 일한 황싱추로 밝혀졌다. 그가 바로 나중에 중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사스의 ‘슈퍼 전파자’였다. 하지만 사스의 비극은 황싱추가 몰고 온 것이 아니었다.

중국 정부는 역병을 방역하기 전에 ‘혀 자르기’식 언론통제를 하는 ‘선제 방역’에 들어갔다. 광저우에서 시작된 역병이 홍콩과 베이징으로 빠르게 번져가던 3월과 4월 초순까지 중국 정부는 “전염병은 정부에 의해 아주 효과적으로 잘 통제되고 있으니 걱정 마라. 발생한 환자도 아주 국부적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안전하다”라는 ‘미친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게다가 ‘인터넷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등으로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은 엄벌에 처한다’고 겁박까지 했다.

다들 알다시피, 중국은 세계 최강의 언론 검열법이 있는 나라다. ‘혀나 펜을 잘못 굴렸다가는’ 어딘가로 조용히 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언론 한 귀퉁이에 이런 기사가 실린다. “○○언론사 소속 ××× 기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언론출판 규정을 심각하게 위반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부정과 비리 등의 문제가 발견돼 직위를 해제하고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한다.”

2003년 4월25일 베이징대 인민병원에 격리된 사스 의심환자들이 밖을 내다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2003년 4월25일 베이징대 인민병원에 격리된 사스 의심환자들이 밖을 내다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금까지 가택연금 상태인 의사

원래 베이징 인근 유명 온천 관광지로 유명했던 샤오탕산에 사스 전담 병원이 세워진 것은 2003년 4월22일이다. 이날부터 일주일 동안 약 7천 명의 인부가 동원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삽질을 해서 (중국 정부의 표현에 따르면) ‘세계 건축사상 유례없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 기적이 바로 올해 3월31일 코로나19로 다시 17년 만에 긴급 재복구된 샤오탕산 전염병 전문 격리 병원이다.

최초의 환자가 발생한 뒤부터 석 달 동안 줄기차게 거짓말과 은폐로 일관하던 중국 정부가 갑자기 병원까지 지을 만큼 ‘똥줄이 탔던’ 것은 역병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퍼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짓말과 은폐, 검열 겁박으로 가려졌던 ‘역병의 진실’이 외부 세계에 폭로됐기 때문이다. 그해 4월 초, 베이징 301병원 의사로 근무하던 장옌융 박사는 미국 시사주간지 에 ‘사스의 진실’을 알리는 성명서를 보냈다. 그는 그전에 여러 번 중국 관영 (CCTV) 등에 “정부가 사스 환자 통계와 상황을 조작, 은폐한다”는 내용을 보냈으나 번번이 묵살당했다. 그 뒤 정부의 거듭되는 거짓말에 분노한 장옌융 박사가 에 글을 보내면서 상황은 급반전됐다.

장쩌민에서 후진타오 시대로의 새로운 권력교체기에 있던 중국 정부는 장옌융 박사의 폭로와 그로 인한 민심의 분노, 애써 묻으려 했던 역병의 확산으로 급하게 안면을 바꿔서 ‘인민의 알 권리와 생명 제일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해 4월17일 열린 정치국 상무회의에서 샤오탕산에 사스 전담 병원을 세우고, 전면적인 ‘사스와의 인민전쟁’을 선포했다.

가장 먼저 외부에 진실을 알렸던 의사, 장옌융 박사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조용히 어딘가로 사라졌다. 알려지기로는, 장 박사는 천안문 사건 당시 기억을 담은 회고록 등을 써서 홍콩에서 출판하려 했다는 이유(국가모독죄)로 지금까지 가택연금 상태란다. 물론 사스 사태 때 에 진실을 전달했던 ‘괘씸죄’도 작용했으리라는 건 ‘안 봐도 비디오’다.

올해 1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의 진실을 가장 먼저 외부 세계에 알렸던 ‘휘슬러’ 리원량 의사도 처음에는 ‘헛소문 유포자’로 몰려 처벌받았다. 진실이 밝혀진 뒤에는 바이러스에 희생됐다. 장옌융 박사의 구금과 리원량의 죽음을 통해, 중국에서 항상 ‘가장 먼저 희생되는 건 진실’이라는, 오랜 괴담을 떨쳐버릴 수 없다.

진실을 말한다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17년 전 사스 때와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중국 정부는 처음부터 은폐와 정보 통제로 일관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후진타오 시절 느슨한 사스 관련 언론통제에 불만을 품었던지, 그 정도를 한층 강화해 사상 유례없는 언론통제를 하고 있다. 소문을 퍼나르는 모든 ‘이발사’는 먼저 혀부터 잘릴 각오를 해야만 한다.

“역병이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가장 먼저 병원을 지어서 인민의 생명을 구했고, 입만 열면 인권과 생명을 떠들던 미국과 유럽 등 서방국가들은 ‘그냥 죽으라’고 했다. 바이러스가 알려줬다. 누가 더 인민의 생명과 인권을 중시하는 국가인가….”

한 중국 친구가 자신의 위챗 타임라인에 올려놓은 포스팅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사스 때 베이징에 샤오탕산병원을 지었던 것처럼, 코로나19가 발병하면서 중국 정부는 가장 먼저 우한에 세계 최대 규모 전염병 전담 병원인 훠선산병원과 레이선산병원을 지었다. 뭘 해도 중국은 ‘세계 최고’를 추구한다. 그것도 열흘 만에 말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처음부터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고 모든 언론의 ‘혀를 자르는’ 대신 적극적으로 전염병의 진실을 알렸다면 굳이 열흘 만에 ‘세계 최대’ 병원까지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17년 전, 처음 사스가 발생했던 광저우에서 ‘괴질 괴담’의 실체만 확인해줬어도 넉 달 뒤 베이징에서 일주일 만에 샤오탕산병원이 급조됐을까? 마오쩌둥이 말하지 않았나. “진실을 말한다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진실을 감추다가 인민이 죽어나가고 하늘이 무너질 듯하니 그제야 부랴부랴 병원을 짓는 정부가 그렇게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곧 이별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낡은 기존 가치와 오래된 세계 그리고 낡은 통합과 작별을 고하려고 합니다.” 샤오탕산에 온천욕을 가는 대신 나는 대만의 전설적인 가수 뤄다유가 1989년에 불렀던 를 듣고 있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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