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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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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

등록 2020-04-04 07:14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네놈의 얼굴을 꼭 보고야 말겠다!” 싸우기로 한 피해자가 눈을 부릅뜨며 외치는 말이다.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수치심을 느끼기 시작한 소수의 가해자가 조그맣게 하는 말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책임, 명예, 인격을 상징하는 얼굴. 사람의 얼굴이란 그런 것이고, 또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그런 사회를 살고 있지 않다.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저주를 퍼붓던 사람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2년 전 혐오세력의 린치를 겪은 인천퀴어퍼레이드 참여자의 증언이다. “그냥 포기하고 공중화장실 갈 때마다 마스크 써요.” 불법촬영이 일상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 여성들의 말이다. 타인의 얼굴을 공격하고, 빌미 삼고, 낄낄대고, 착취하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살아간다. 성폭력 모의와 성착취물 유통이 이뤄졌던 소라넷 회원 100만 명, 에이브이스누프(AVSNOOP) 회원 122만 명, 통칭 ‘엔(n)번방’ 참여자 26만 명. 이들의 얼굴을 모르는 것도 끔찍하고, 아는 것도 끔찍하다.

면식범, 아는 얼굴의 폭력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가 잘못했는데,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 때가 있다. 잘못을 부인하는 가해자, 자기가 저지른 범행을 묘사하면서 ‘태연한’ 범죄자를 볼 때 그렇다. 조주빈이 유아적 허세에 찌든 흔하디흔한 남성 중 하나일 뿐임을 알면서도, 나는 대부분의 언론 기사가 싣는 조주빈의 사진을 보기 괴롭다. 섬네일로 올라온 얼굴을 안 보고 기사 내용에만 시선을 두기 위해 모니터의 일부를 가릴 때도 있다. ‘얼굴’이기 때문이다.

얼굴은 인격을 상징하고 인간관계를 매개한다. 인간인지를 의심케 하는 폭력을 저지른 자가 ‘나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 주는 충격과 훼손. 폭력은 타인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고, 피해자는 ‘가해자도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 얼굴의 평범함에 상처받는다. 부조리는, 가해자는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성폭력 가해자의 80% 이상이 면식범이다. 즉, ‘얼굴을 아는 사람’을 공격하고 모욕한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내가 아는데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틀렸다. 그럴 사람이 아닌 줄 알았던 신뢰를 이용하고 파괴하는 것이 바로 면식범 범죄의 기반이자 내용이다. 초등생이 ‘엄마 몰카’를 올리고 ‘지인능욕’이 장르가 된 사회다. 수십 년에 걸쳐 싸워온 여성들의 노력을 기억한다면, 우리에겐 순진할 권리가 없다. 똑바로 보자. ‘지인임에도’가 아니라 ‘지인이라서’ ‘능욕’한다. ‘엄마마저’가 아니라 ‘엄마여서’ ‘몰카’를 찍어 올린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임을,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싸우는 얼굴들의 안부를 묻는다

‘n번방 사건’에 대해 쓰겠다고 마음먹는 데만 2주를 바쳤다. 쓰겠다고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탈진한 느낌이다. 지금 이 사건에 대해, 아니 우리 문화 전체라고 할 만한 모든 것에 개입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거의 의무감을 느끼며 그 글들을 뒤쫓는다. 기사로, 청원으로, 공유로, 집회로, 성명서로, 뭐라도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하고, 마음속으로 안부를 묻는다. 일면식도 없는 이의 고통에 책임을 느끼고, 그 고통을 상상하며 몸이 아프고 밤마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얼굴들을 말이다. 인간의 얼굴, 그 사이에서만 나도 인간일 수 있다. 그러니 무뎌지지 않기 위해 애쓰기로 한다.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줄 아는 인간으로 살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수치심과 죄의식에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다’고 말하는 걸 볼 때까지, 가해자들의 얼굴을 응시하자.

전희경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옥희살롱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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