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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한 ‘직권남용 그물’ 양승태도 빠져나갈까

사법농단 연루 판사 줄줄이 무죄… 법원의 ‘봐주기’인가, 검찰의 ‘무리수’였나
등록 2020-02-22 05:59 수정 2020-05-02 19:29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019년 12월11일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019년 12월11일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다.’ ‘애초부터 검찰 수사가 무리했다.’ 하나의 판결을 놓고 정반대 평가가 나온다. 그것도 법률 전문가라 불리는 법조인들 사이에서. ‘사법농단’에 연루돼 기소된 판사들이 최근 1심에서 줄줄이 무죄판결 받은 것을 두고 벌어지는 일이다.

서로 상반된 평가는 ‘적폐 청산’ 차원에서 진행된 사법농단 수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대체로 일치한다. 검찰 수사에 긍정적이었던 쪽은 법원의 ‘봐주기 판결’이라는 혹독한 평가를 내린다. 재판부가 동료 판사들을 봐주기 위해 죄형법정주의를 핑계 삼은 엉터리 판결이라는 것이다.

“재판 개입 했지만 죄를 물을 수 없다“

2월14일에 있었던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의 판결이 대표적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부(재판장 송인권 부장판사, 김택성 판사, 김선역 판사)는 가토 다쓰야 전 서울지국장(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기사를 써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됨)의 재판 등에 개입한 혐의(직권남용)로 기소된 임 부장판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임 부장판사의 행동이 “재판 개입”이란 점은 인정했다. 심지어 “법관의 독립을 침해한 위헌적 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럼에도 임 판사를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사법행정권을 가진 판사가 일선 재판에 관여할 직무 권한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법리상 직권을 남용했다고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위헌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직권남용죄의 형사책임을 묻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고 했다.

‘위헌이지만 처벌할 수 없다’는 재판부의 논리는 사법농단 수사를 지지했던 이들에겐 궤변으로 들린다. 참여연대는 “일반 상식을 파괴하는 어처구니없는 판결”이라며 “법원의 ‘셀프재판’으로는 사법농단 책임자들을 제대로 처벌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고 비난했다. 설상가상으로 김명수 대법원장이 임 부장판사 판결 직후 그를 포함해 재판 업무에서 배제됐던 사법농단 연루 판사 8명을 재판 업무에 복귀시켜 여론을 악화시켰다. “형사재판의 피고인이 재판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재판 업무에서 배제한 지 채 1년도 안 돼서 내린 조처다. 사법농단 사태 초기에 법원 내부의 반발을 무릅쓰고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했던 대법원장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확 바뀐 태도다.

반면 사법농단 수사에 비판적이던 이들은 검찰 수사가 애초부터 무리였다고 지적한다. 사법농단 관련 판사들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긴 하지만 형사처벌까지 할 사안은 아니라는 시각이다. 이는 사법농단 수사를 주도했던 ‘윤석열 사단’의 수사 스타일에 대한 반감과 통한다. 죄가 될 만한 것은 싹싹 긁어모아 재판에 넘기는 ‘저인망식 수사’는 검찰권 남용에 해당한다(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경우 무려 47개 혐의로 기소됐다). 따라서 법원이 판결로 이를 견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이 두려워 이를 견제하지 않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국민의 기본권 보호’라는 사법부의 소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 식구 감싸기’ vs ‘검찰 수사 무리’

실제로 사법농단 수사는 시작부터 검찰권 남용 시비에 휘말렸다. 100명에 이르는 판사들이 조사받는 과정에서 ‘강압수사’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검사가 요구한 때 출석하지 않거나, 검사가 원하는 답변을 하지 않을 경우 (참고인 신분에서) 피의자로 신분이 바뀔 수 있다는 협박을 받았다는 판사들의 증언이 잇따랐다. 검찰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오히려 상대가 판사들이기 때문에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절차를 과할 정도로 엄격하게 지켰다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판사이기 때문에 특혜를 줬다는 지적이 나올까 걱정할 정도로 조사에 신중을 기했다. 강압수사 논란은 사법농단 수사에 흠집을 내려는 음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사법농단 재판의 잇단 무죄판결이 최고 책임자인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고영한 두 전직 대법관의 판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쏠린다. 양 전 대법원장 등 수뇌부가 무죄판결을 받는다면 사법농단 수사의 정당성은 그만큼 훼손된다. 이는 ‘윤석열 검찰’은 물론 적폐 청산을 이끌었던 청와대에도 타격을 줄 것이다. 김명수 사법부는 법원 자체 징계와 국회 탄핵, 검찰 수사 등의 해법 가운데 검찰 수사를 택했다. 당시 청와대는 윤석열 검찰의 ‘적폐 수사’ 능력을 신뢰하던 때였다.

임 부장판사 등의 무죄판결이 양 전 대법원장 등에게 유리한 쪽으로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긴 하다. 앞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1월30일)에서도 직권남용 범위를 좁게 해석했다. 임 부장판사 판결은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따른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 판결도 큰 틀에서 이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

양승태 재판에 쏠린 눈

하지만 반론도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임 부장판사와는 급이 다른 신분이다. 사법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동시에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재판장이었다. 강제동원 재판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할지 결정하는 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반적 직무 권한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검찰 관계자는 “강제동원 재판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도록 개입한 것은 대법원장의 권한으로 봐야 한다. 더욱이 임성근 재판에서 재판 개입을 위헌 행위라고 인정했기에 양 전 대법원장은 더욱 큰 책임을 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두 달여 중단됐던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은 2월21일 재개됐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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