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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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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각성제’의 근대적 음모

밀레니얼 세대와 성인 ADHD 급증 이야기
등록 2020-02-03 16:04 수정 2020-05-02 19:29
넷플릭스 <슈퍼맨 각성제>의 한 장면. 넷플릭스 화면 갈무리

넷플릭스 <슈퍼맨 각성제>의 한 장면. 넷플릭스 화면 갈무리

초등학교 시절, 교장 선생님 훈화가 따갑게 내리쬐는 조회 시간이면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흐트러졌다. 두 다리를 컴퍼스 삼아 모래 원을 그리거나 개미의 행렬을 방해하고, 몰래 종이쪽지를 전달하거나 열중쉬어 자세의 앞 친구 손을 움켜쥐며 전기 통하기 놀이를 하곤 했다. 그런 날 과학 시간이 있다 하면 운동장에 희미한 탄내가 떠돌곤 했는데, 몇몇이 주머니에 꿍쳐둔 돋보기를 꺼낸 탓이었다. 운동화의 콧등이나 들벌레, 낙엽 따위를 조준하다보면 훈화 시간도 야금야금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태우기 놀이에 금방 흥미를 잃었던 것 같다. 묵직하고 투명했던 친구의 유리 돋보기와 달리, 내 돋보기는 허연 흠집투성이의 모조 유리여서 빛을 모으는 게 시원찮았던 이유로 기억한다.

나는 자주 나 자신이 그 모조 돋보기 같다고 생각했다. 목표한 과제에 주의를 집중하는 데 매번 실패했고, 주변은 정리정돈이 되지 않아 불투명하거나 산란된 상(象)이었다. 또 대학교 때 별명 중 하나가 ‘다람쥐’였을 정도로 두 손을 그러모아 손톱을 뜯어대 손가락 끝은 늘 허옇게 거스러미가 일었고, 어쩌다 ‘주의력 초점’에 맞는 일을 발견해 과하게 열정을 태우다보면 공인인증서 갱신 같은 책무나 약속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노트북 바탕화면은 항상 각종 파일과 이미지로 가득했다. 어쩌다 흥미에 맞는 강의는 A+, 나머지 강의들은 교수님의 제스처를 관찰하거나 시험 날짜를 까먹는 등으로 C+인 학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최근 나의 이런 오랜 습관을 설명해주는 개념을 만났다. 요즘 우리 사회에 새롭게 확산 중인 병명,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가 그것이다.

내 말을 듣지 않는 나

“네가 ADHD라고?” 내가 ADHD 진단을 받았다고 했을 때 주변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보통 ADHD라고 하면, 남자아이가 다리를 심하게 떨거나 소리를 지르며 수업을 방해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조금 엉뚱한 구석이 있어도 평소 조용한 성격에 작가로 활동하는 나와는 거리가 멀기는 하다. 하지만 성인 ADHD와 여성 ADHD의 개념은 꼭 그렇지 않다고 알려줬다.

성인 ADHD는 어느 정도 사회화가 돼서 과잉행동이 거의 없는 ADD(Attention Deficit Disorder·주의력결핍장애)인 경우가 많다. 특히 여성 ADHD는 남들의 기대에 잘 맞추고 부정적 감정을 잘 숨기는 여성성 규범 탓에 증상이 더욱 눈에 띄지 않는다. 돌아보면 나는 “생각과 고민이 많아 사색에 잠길 때가 많음”이라는 고3 담임선생님의 생활기록부 평가처럼 겉으로는 조용하되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성적이 갈팡질팡했고, 학부 때는 개인 과제일 경우 과제 미제출이 다반사였지만 조별 과제 때는 다른 사람의 성적까지 걸린 일이라 기본은 하는 식이었다.

처음 자신을 ADHD로 의심한 것은 지난해 겨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도 집중을 잃었을 즈음 소셜네트워크에서 성인 ADHD와 여성 ADHD의 간이 검사지나 증상을 고백하는 게시물을 보았다. 그 ADHD 체크리스트를 훑었을 때 ‘꼭 맞는 옷’을 발견한 기분이었고, 마침 주변에 ADHD 확진을 받은 지인들이 있어 그들에게서 얻은 정보와 인터넷 검색 정보를 바탕으로 ADHD 전문 정신과를 방문했다. 생활기록부나 자기공명영상(MRI) 검사까지 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ADHD 검사지와 의사 소견에 따라 ADHD 진단을 받았다. ADHD 개선제인 아토목세틴과 항우울제인 프로작을 처방받아 3주간 복용했다. 중추신경계를 자극하는 약물인 콘서타, 메틸페니데이트가 아니어서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었다(엉뚱하게도 뚜렷이 겪은 효과는 프로작의 부작용 중 하나인 ‘고양이 알레르기 퇴치’였다).

ADHD 진단을 받았을 때,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그동안 도통 ‘내 말을 듣지 않는 나’와 싸웠던 마음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종종 억울함도 찾아왔다. 이 장애 때문에 더 나은 삶에서 낙오됐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편으로 ‘정신병자’가 욕이 되는 사회에서 진단이 ‘선고’로 느껴져 두렵기도 했고, 내 게으름에 대한 공식 핑계권을 얻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처방전을 손에 쥐니 천재 나라의 입장권을 끊은 듯해 설레었다. (평소엔 좋아하지 않지만) 가수 저스틴 팀버레이크, 수영 선수 마이클 펠프스, 에디슨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수많은 ‘능력자’가 ADHD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능력자’ ADHD가 너무 많은 이유

ADHD답게, 다른 일은 제쳐놓고 ADHD 관련 의학 서적을 과도하게 탐독하면서 ADHD 자가 인지 치료를 병행했다. 기존 종이 다이어리에 적었던 스케줄을 언제든 확인 가능한 구글 캘린더(달력)로 옮기고, 왜곡된 시간 지각을 보완하려 친구에게 부탁해 생일 선물로 손목시계를 받아 날마다 착용하고, 시간관리인 ‘포모도로(Pomodoro·25분 일하고 3~5분 짧게 쉬고를 반복함) 기법’을 활용하고, 성인 ADHD 커뮤니티 ‘에이앱’에 접속해 다른 사람들의 ADHD 일지를 읽으면서 의지를 다졌다. 미국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Reddit)의 ADHD 커뮤니티도 발견해서 ‘양말 신는 일에 중압감을 느껴 소파에서 진정하느라 외출하는 데 8시간 걸림’ ‘ADHD의 시간에 따른 강의 노트 필기 양상’ 같은 ADHD ‘짤’(짧은 동영상이나 사진)들을 보면서 낄낄거렸다. 그런데 문득 이상했다. ADHD 환자가 너무 많았다. 그것도 미국 아이비리그(미국 북동부의 8개 명문 사립대) 대학원생, 변호사, 의사 등 ‘성공한’ 이들이.

그러고 보니 주변에 ADHD 확진을 받은 이들, 간이 검사지에서 전문의 상담 권고를 받은 지인이 6명이나 됐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높은 확률이었다. 애초에 내가 정신과를 찾은 계기도 소셜네트워크에 퍼지던 ADHD 게시물 때문 아닌가. ADHD 진단을 받은 한 지인은 트위터에서 2017년 네이버에서 홍보한 ‘성인 ADHD 캠페인’을 소개하는 게시물을 보고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이내 ADHD가 미국과 유럽의 ‘밀레니얼 세대’ 특징으로 꼽힌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미국 청소년과 청년들 사이에서 일상이 된 ADHD 약물 문제를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Take Your Pills, 2018)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성공적인 대학 생활을 위해서는 두 가지만 준비하면 된다. 인스타그램, 그리고 애더럴(암페타민계 ADHD 치료제).” 이전 젊은이들이 약물에 취한 것이 일탈을 위해서였다면, 이젠 학교생활에 완벽히 적응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의 저자 피터 콘래드는 “성인 ADHD의 쟁점은 행동이 아닌 성과다. (…) 이 경우, 약물치료는 사회통제의 모습을 띤 증강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ADHD 비판 담론’은 공통으로 젊은이들의 ADHD 진단에는 ‘ADHD 유발 사회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도 ADHD ‘상륙’은 성공적이었다. 국민건강보험이 지난해 발표한 건강보험 진료 현황을 보면, ADHD 진료를 받은 20대 이상 성인이 2013년 3139명에서 2017년 8214명으로 5년간 2.6배 이상 늘었다.

네이버 성인 ADHD 캠페인과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에 넘치는 ADHD 언급들.

네이버 성인 ADHD 캠페인과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에 넘치는 ADHD 언급들.

왜, 말 잘 듣는 아이가 ‘정상’일까?

ADHD의 주변 지형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ADHD에 대한 관점이 ‘문제 해결’에서 ‘문제 제기’로 옮겨갔다. 나는,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왜 산만해졌을까? 우선 어릴 적에 조회 시간이 없었다면, 아이들이 산만해질 이유도 없었다. 그때 모든 아이가 ADHD 약을 삼키고 일동 차렷 자세로 교장 선생님 훈화를 들었다면, 괜찮았을까? ADHD 개념 자체에 교육 대상으로서 ‘아동기’를 발명한 ‘근대 공교육 체제’가 전제돼 있다. ADHD란 교육 시스템보다는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애들’을 정상으로 보는 시각에서 출발했다.

ADHD를 알았을 때 느꼈던 ‘억울함’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니까 ADHD가 아니었다면 더 좋은 성적을 받아 더 좋은 대학 간판을 얻고, 더 좋은 조건의 직장에 다닐 수 있었을 거라는, 사회의 ‘정상 시민’ VIP 회원권을 끊을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었다. 내가 ADHD 해결로 얻으려는 게 그런 ‘비정상성’을 교정하거나 극복한 상태인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봤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유명한 심리학 실험이 있다. 사람들에게 1분가량의 영상을 보여주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공을 몇 번 패스하는지’ 맞히라는 간단한 실험이었는데, 사실 이 영상 중간에는 고릴라 탈을 쓴 사람이 나타나 가슴을 치고 지나간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의 절반이 고릴라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릴라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연구자들의 지시에 따라 주의 집중력을 잘 발휘한 사람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산만한 사람이었다.

주의력은 주어진 과제를 잘 수행하게 할지는 몰라도, 그 과제 밖의 시야는 가릴 수 있다. 가슴을 치는 고릴라를 보는 일 따위는 쓸데없을지 모른다. 수업 시간에 교과서 대신 창문의 얼룩에 관심을 빼앗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 대신 주의력 결핍은 ‘중심, 확대, 증강’의 반대 가치를 가리킨다. 그리고 ‘장애, 질병, 취약함’을 사유하게 하는 렌즈를 씌워준다. 이런 맥락에서 ADHD가 잠재력이 있다는 말도 이 사회에서의 ‘쓸모’를 말한다는 점에서 숨이 막혔다.

산만함이 빛나는 세계는 어디에

이런 질문도 이어졌다. 왜 친구는 유리 돋보기고, 나는 모조 돋보기였을까? 집안 사정에 따라 준비물이 달라진 것이었다. 집안 사정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가 빛 모으기에 상관했다. 빛을 잘 모으려면 흐린 날이어서는 안 되고, 남향에다 반지하 공간이 아니어야 한다. 이러한 도구의 차이나 조망권은 ‘주의 집중의 경제’를 환기한다.

이제 이렇게 질문할 줄 안다. 모두가, 모든 순간에 돋보기일 필요가 있을까? 다들 빛의 속도로, 직진 방향으로 집중해야만 할까? ADHD 재능을 발휘해 엉뚱한 상상을 해보겠다. 빛을 한 지점에 집중하기보다, 어지러이 굴절시켜서 놀 수도 있지 않을까. 나아가 아예 돋보기를 깨뜨려보면 어떨까? 그 빛무리 아래에는 검은 종이 대신 까마귀, 고양이, 나방처럼 부서진 빛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존재들 그리고 중심에서 다종다양하게 흐트러진 존재를 불러 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다음 각자 비효율적인 몸짓인 춤을 추고, 비효율적인 대화인 유머를 실컷 나누는 거다. 그곳은 산만함이 빛나는 세계이길 바란다. 무엇도 애태우지 않으면서.

도우리 프리랜서 칼럼니스트 wrd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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