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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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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비밀에 밀리는 노동자 건강권

사업장 안전 보여주는 ‘작업환경측정보고서’ 두고

반올림-삼성전자 법정 대리전, 2월 중 선고 예정
등록 2020-01-13 01:53 수정 2020-05-02 19:29
반올림의 임자운 변호사(2018년 7월 촬영). 김명진 <한겨레> 기자

반올림의 임자운 변호사(2018년 7월 촬영). 김명진 <한겨레> 기자

2019년 12월18일 오후 6시 서울행정법원 B220호 법정. 한 변호사가 열변을 토했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벤젠(1급 발암물질)이 노출된다는 사실은 2009년 연구조사를 통해 처음 알려졌고, 그 후 여러 건의 산재 소송을 통해 거듭 확인됐습니다. 그때까지 공장 내 벤젠 노출에 대한 측정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는데, 삼성전자는 ‘그 시점에는 노출 가능성이 제기되지 않았던 물질’이었다고 해명합니다. 그렇다면 노출이 확인된 뒤에는 어떨까요? 2009년 이후 삼성이 제출한 ‘작업환경측정자료’ 어디에도 벤젠에 대한 측정 기록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벤젠을 함유하고 있는 물질을 더 이상 취급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벤젠 노출을 계속 방치하는 것일까요? 둘 중 어느 것인지 알기 위해선 작측 보고서(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봐야 합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의 임자운 변호사였다. 그는 삼성전자 사업장의 작측 보고서를 공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날 법정에선 반올림과 중앙행정심판위원회(중앙행심위)의 ‘정보공개결정 취소재결 취소’ 최종변론이 있었다. 피고는 공공기관이지만 사실상 반올림과 삼성전자의 법정 싸움이었다. 삼성전자는 피고 보조참가인 자격으로 참석해 작측 보고서를 공개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작측 보고서는 사업장 내 유해물질 노출 실태를 알 수 있는 자료다. 공정명, 단위작업 장소, 유해인자 명칭, 근로자 수, 근로형태와 실제 근로시간, 유해인자 발생 시간, 측정 위치, 측정 시간, 측정 횟수, 측정치, 시간 가중 평균치, 노출 기준, 측정 농도 평가 결과, 측정 방법 등 구체적인 정보가 담겨 있다.

작측 보고서를 둘러싼 반올림과 삼성전자의 다툼은 ‘2018년 11월 중재 합의’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 이유와 진행 과정, 주요 쟁점을 정리했다.

산재 인정을 좌우하는 ‘작측 보고서’

2012년 사망한 이은주씨의 산업재해 소송은 작측 보고서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씨는 1993년 만 17살로 삼성전자에 입사해 1999년 퇴사할 때까지 충남 온양공장에서 일했다. 2000년 난소암 진단을 받고 12년 투병 끝에 사망했다. 같은 해 이씨의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신청을 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연)이 역학조사에 나섰다. 조사 과정에서 삼성전자는 “(이씨가) 어떠한 화학물질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산보연이 작측 보고서를 요청하자 “(이씨가 일했던) 금선연결 공정에서는 작업환경측정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산보연은 별도의 측정 없이 삼성전자의 진술을 토대로 “금선연결 공정에서는 난소암과 관련 있는 유해인자들을 취급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고,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삼성전자의 진술이 산재 불승인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셈이다.

이은주씨 유족은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과정에서 이씨가 에폭시 접착제와 세척제 등을 다뤘으며, 이로 인해 포름알데히드·페놀·납 등 여러 유해물질이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이씨는 산재를 인정받았다.

만약 삼성전자가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에 따라 작업환경 측정을 제대로 했고, 산보연에 작측 보고서를 제때 제출했다면 이씨가 산재 인정을 받는 과정은 훨씬 간단했을 것이다.

삼성전자는 작측 보고서가 공개되면 공정 간 배열, 설비 기종과 보유 대수, 생산능력, 반도체 후공정 자동화를 통한 인건비 절감 효과 등 영업비밀이 노출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근로복지공단이나 법원의 요청이 있을 때도 산안법에 정해진 작측 보고서 원본이 아닌, 자체 편집한 ‘작업환경 측정 결과’를 공개해왔다. 반올림은 이 자료를 신뢰할 수 없고, 재해 노동자가 직접 담당한 공정에 대한 측정 기록만 나타나 있어 주변 공정에서 노출되는 유해물질은 전혀 알 수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삼성이 작측 보고서 원본을 제출하지 않는 일이 수년간 반복되자, 반올림은 2016년 삼성전자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이아무개씨의 유족을 대리해 정보공개 청구소송에 들어갔다. 삼성전자는 공공기관이 아니므로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정보공개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산안법에 따라 작측 보고서를 고용노동부에 제출해야 한다. 반올림은 고용노동부에 정보공개 청구를 해 우회적으로 삼성전자의 작측 보고서를 입수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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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국가 경제에 심각한 위협”

이때부터 반올림과 삼성전자의 치열한 법리 싸움이 시작됐다. 정보공개법 제9조 1항 7호를 보면 “법인·단체 또는 개인의 경영상·영업상 비밀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법인 등의 정당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는 비공개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단서 조항으로 “사업활동에 의하여 발생하는 위해로부터 사람의 생명·신체 또는 건강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개할 필요가 있는 정보”는 제외하고 있다.

반올림은 작측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 공정에 대한 개괄적 소개라 이미 공개된 내용이며, 측정 위치도 간략하게 그린 모식도에 불과해 기술정보나 영업비밀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생명·신체·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 또 유해물질이 제대로 측정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공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삼성전자는 작측 보고서가 노출되면 국외 경쟁업체가 영업비밀을 파악해 국가 경제에 심각한 위협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또한 작측 보고서를 이미 현직 노동자에게 공개하고 있고,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산재 판정시)에도 제출하므로 일반에 공개하지 않아도 노동자의 생명·신체·건강을 보호하는 데 별다른 영향이 없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씨를 대리한 반올림의 손을 들어줬다. 2018년 2월 대전고등법원은 온양공장의 작측 보고서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고용노동부가 대전고등법원의 판결을 참조해 작측 보고서를 적극 공개하겠다고 했다.

알 권리 막는 정부와 국회

삼성전자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선 산업통상자원부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작측 보고서를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산업부는 2018년 4월 이를 받아들였다. 삼성전자는 또 중앙행심위에 고용노동부의 작측 보고서 공개 결정을 취소해달라고 요청했다. 2018년 7월 중앙행심위는 삼성전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작측 보고서의 핵심 내용인 측정 대상 공정, 화학물질명, 측정 위치도를 비공개 대상 정보라고 판단했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반올림은 중앙행심위의 결정이 삼성전자뿐 아니라 SK하이닉스나 삼성LCD를 상대로 한 산재 소송에도 영향을 미쳐 작측 보고서 공개에 지장을 줬다고 했다. 그래서 중앙행심위의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에 들어갔다.

반올림은 끝없는 싸움을 하는 중이다. 한 고비를 넘기면 더 큰 산이 나타난다. 서울행정법원의 선고는 2월 중 나올 예정인데 여기서 이긴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국가핵심기술이면 생명·안전과 상관없이 비공개 대상으로 삼는 ‘산업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2019년 8월20일 국회를 통과하는 바람에 앞으로 작측 보고서 공개는 더욱 어려워지게 됐다(시행은 2020년 2월21일부터). 이제 작측 보고서에 대한 국가핵심기술 지정을 취소하거나 법을 바꿔야 하는 난관이 생겼다. 반올림의 ‘알 권리 싸움’이 중대한 위기에 처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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